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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라디오미르』 파란시선으로 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7. 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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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중간 지대에서 선택된 모호함의 자유 의지

 

 

 

김분홍 기자

 

류성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라디오미르가 파란시선으로 출간되었다. 라디오미르에는 왕표연탁,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55편의 시가 실려 있다. 류성훈 시인은 2012한국일보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며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라디오미르, 산문집 사물들-The Things, 장소들-The places를 썼다.

 

박상수(시인·문학 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류성훈의 시편들은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다가갈수록 (표면적으로는) 오히려 실체가 부인되고 사라져 버리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읽으면 읽을수록 몽환적인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기분에 사로잡힌다고 해도 좋으리라. 중요한 점은 이것이 시적 화자의 적극적인 의지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최선을 다하여 세계가 명백하게 밝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고 할까. 바로 이 언어적 수행을 통해 류성훈의 시적 화자는 사물의 구별이 사라진 어둠 속에 머물러 있을 때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낮의 경계가 지워지는 모호한 어둠은 오히려 파괴와 종합의 양극을 긴장감 있게 견디는 가능성의 중간 지대"라고 했는데 이는 선택된 모호함이 갖는 자유 의지를 강조한 말이다.

 

소쉬르는 개인이 발화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는 언어적 행위를 파롤(parole)이라 부르며, 언어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체계를 랑그(Langue)로 구분 지었다. 따라서 문법은 랑그의 일종이고 시를 쓰는 행위는 그 문법에 맞추어 파롤, 즉 언어적 수행을 하는 것이다. 파롤은 개인적인 발화이며 말하는 사람의 맥락에 따라 움직인다. 이처럼 지극히 사적이며 가변적인 류성훈 시인의 언어적 수행 행위는 모호함 안에 자유 의지와 가능성을 낳고 독자들에게 상상하며 시를 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류성훈 시인의 가변적인 문장들을 읽는 동안 왜 살지, 왜 숨 쉬지, 왜 시 쓰지, 계속 묻다가 지치게 된다. 이 지독한 체험 속에 있을 때 나는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묻는 물음의 호소력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해진다라고 말한 김기택 시인의 추천사 또한 독자를 텍스트 주체로 만드는 힘을 라디오미르가 가지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란 걸 알게 된다. 라디오미르는 독자에게 자유의지, 상상의 공간, 주체의 자리라는 가능성을 내어주는 독특한, 혹은 독자적인 시집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라디오미르

 

류성훈

 

바늘에 불빛을 바르다 천천히 녹아 버린 몸들이 있었다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별, 너의 보이지도 않는 베어링 위에서 손과 붓은 같은 이름으로 칠해지는 곳을 향해 크고 텅 빈 가방을 둘러메곤 했다 시침보다 빠르고 분침보다 느린 곳에서 시간은 몰래 바그너의 LP 따위를 걸었을 것이다

연금술을 배울 거야,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황금시대든 황금 알이든 본 적도 없는 책들처럼 우리는 반짝이는 어둠만 그리워하며 모래를 치웠지, 그건 모래가 아니라 죽은 기억의 뼈들이었고 알고 난 후를 환, 그 이전도 환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발음들이 서로에게 침 냄새를 묻혀 갈 때, 밤이 땅의 반대편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은 밤뿐이라 여겼다 복족류처럼 끈적한 발을 우주까지 들이밀어 봤다면 우리가 사랑한 것은 반짝이는 것보다 반짝인다는 말을 위한 혀의 원리였을 거야 우리는 구개음화 이전의 해돋이 앞에서 스스로 빛나는 것 하나와 스스로 빛나는 방법 열 가지를 읽었고 너는 고작 한 가지인 나를 열 가지 방법으로 꺼뜨려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결코 조용한 적 없는 저 밤은 너머,라는 이름의 나라를 그리워하도록 우리의 걸음들에 기관처럼 이름을 붙였고 이름과 아름다움은 구별되지 않는 세포였다 우리를 붓질하던 발음은 사실 밤이 아니라 밤의 기억이라는 저주, 서로라는 말은 왕복운동, 각자라는 말은 회전운동이었던 손바닥 위에서 우리는 여행 이전의 심장을 동력학적으로 퍼올린다 네가 애초 맞지 않는 잠옷의 다리를 자르려 했을 때 밤은 혀를 잃었고 나는 맛을 잃었지만 말은 얻었다고 생각했었다 이불 속 같은 바다에 빛을 보러 가기 위해 창틀에 말려 놓은 해를 나는 끝까지 못 본 척했었다

해치를 열기 위해선 우선 닫아야 해, 녹아 버린 몸들이 너설을 걸어오던 선창 안에서, 물에 빠져 죽지는 마,라고 너는 내게 말했다

 

― 『라디오미르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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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

 

류성훈

 

자전만 있고 공전은 없는 춤들

달을 따라 수없이 떠돌려 했지만

허리도 무릎도 가진 적 없는 행성들은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신전에는 상현도 하현도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하고

튼튼하게 떠받쳤지만, 재생되지는 않았다

콘덴서가 나가면 콘덴서를 갈고

사람이 나가면 사람을 갈고

 

죽었던 괴물들이 살아 돌아왔다

누구는 달을, 누구는 괴물을 사랑했고

달은 누가 괴물이건 그들을 사랑했지만

재생되지는 않았다

그렇게도 울고 웃던 영화 제목을 모르겠어

내가 네게서 갑자기 떠날까 두려울 때

 

용서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

전구를 갈아 줄 사람이 필요해서

전구를 갈았다

 

괜찮아, 천천히 멀어질 뿐이지

 

― 『라디오미르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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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리동(堂里洞)

 

류성훈

 

기름층을 도려내다, 돼지고기에서도

암 같은 게 있네 아직은 무사한 가족이

수육이라도 삶자고 할 때, 모두가

슴베 쪽에 더 가깝다는 걸 알 때

날은 잘 들어야 오히려 안전하지, 괜히

암 덩이를 만들고 그걸 또 도려내면서

돼지 냄새는 싫다는 서슬이 있다

 

앞집이 사별하고 뒷집이 다 날리고

옆집이 갈라서고 아랫집이 안됐고

염증이 아프고, 더 아파, 널리고 널린 얘기

고통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듯, 엄마

아픈 소리 그만 좀 하라고, 나도 힘들다고

어느새 현관을 쳐다보지도 않는 말

 

그것은 할 말 없어진 세상과

가진 게 없어진 내가 함께 지르는 소리

인 줄 알았는데

할 말 없어진 세계보다 할 말 없어진

나도 엄두가 안 나는 것들

 

우리 집은 원래 어디일까

집이란 무엇일까

모두가 힘들다는데 이런 세상에서

글이나 써 미안해요 그런 내가

아들이라서 미안해요

 

복개된 사하(沙下)

폭탄머리를 한 아이 하나가

늙은 가족들을 따라온다

 

― 『라디오미르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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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라디오미르』 파란시선으로 발간 - 미디어 시in

김분홍 기자 류성훈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라디오미르』가 파란시선으로 출간되었다. 『라디오미르』에는 「왕표연탁」,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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