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즈가 나간 숲
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 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마다 넘치는 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짓돈 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한혜영 시인 _ 퓨즈가 나간 숲 < 포토포엠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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