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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 _ 배경희의 「검은 DNA」

시조포커스

by 미디어시인 2022. 10. 2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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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DNA

 

배경희

 

칠판을 긁었다, 날카로운 금속성


뇌 속에 인지되는 저 비명이 나는 싫다


거대한 공룡이었을까 몸을 숨기고 있나


뭔지는 모르지만 무서운 게 틀림없어


먼 옛날 혹시 나는 고라니 염소였을까


내 몸속 기억하는 것, 강한 것의 두려움들


연둣빛 풀들 사이 검은색이 꿈틀한다


천년의 고요를 심장 속에 감추었나


한겨울 바람 소리에도 온몸이 붉어진다

​ - 배경희, 『사과의 진실』, 시인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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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암리에 무의식을 통해 전해지는 것, 우리의 몸은 드러나지 않은 DNA를 품고 있다. 트라우마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비롯해 무언가 충격적인 일들을 만나면 우리는 보통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짓눌러 놓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이 튀어나와 발현되게 돼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나의 후손들에게 나타날 수 있다. 모든 인류가 겪었던 공포와 불안, 죄의식, 수치심과 무기력 등의 증상은 후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전해지는 것인데 그들은 이런 부정적인 정서나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조상들이 육체적·정서적으로 겪었던 일들은 어둠의 통로를 통해 그대로 후손들에게 전달되는 것인데 말이다. DNA가 자기 스스로를 복제해 세대를 이어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생물학적 존재라고 한다면, 하나의 완성된 지식과 문화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과 문자로 세대를 넘어 보전되고 전파된다는 개념을 ‘밈meme’이라고 했다. 선조들이 경험을 통해 축적한 정서적·신체적 정보는, 세포 복제를 통해 후손들에게 그대로 축적된 채로 전이되고 있다는 것이 ‘밈’이다. 그래서 장기를 새로 이식받은 사람이 종종 장기를 기증한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 혹은 재능을 가지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현상 또한 ‘밈’ 유전자와 연관이 돼 있다고 본다.

주체는 칠판 긁을 때 나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싫다. “뇌 속에 인지되는 저 비명이 나는 싫”은 이유는 주체의 몸이 기억하는 검은 DNA 때문이다. “거대한 공룡이었을”지도 모르는 그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무서운 게 틀림없”다. 아마도 “먼 옛날 혹시 나는 고라니 염소”같은 미약한 초식동물이어서 맹수에게 쫓기다가 결국 잡아먹혔을까? 몸이 기억하는 것은 “강한 것의 두려움들”이어서 더 공포스럽다. “연둣빛 풀들 사이”로 뭔가 “검은색이 꿈틀”하는 것만 보아도 “천년의 고요”가 꿈틀한다. “한겨울 바람 소리에도 온몸이 붉어지는” 주체는 거대하고 강한 것을 두려워하는 검은 DNA의 소유자다. 먼 옛날 무의식을 통해 물려받았을 DNA가 우리에게도 있다.

 


이송희

2003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 『눈물로 읽는 사서함』,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현대시와 인지시학』, 『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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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 _ 배경희의 「검은 DNA」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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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디어 시in(http://www.msiin.co.kr)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 _ 배경희의 「검은 DNA」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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