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김소해
잃어버리고 살았던 건 없어도 된다는 것
없어도 된다는 건 잊어버려도 좋다는 것
잊어서
비워진 거기
마음자리 넓이만큼
― 『단시조』, 연대동인 제19집, 우리출판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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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라디오의 사연들. 오늘은 특별히 건망증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딸아이에게 질문하는 어머니의 질문법이 한바탕 쓴웃음을 짓게 하였다. “야, 있잖아, 그거그거, 길고 뽀족하고 자주 쓰는 거”, “그게 뭔데 칼?, 가위?, 이쑤시개?”, “아이참, 그것도 몰라? 그거그거.” 이런 식이다. 단어를 잃어버린 중년들의 대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는 선명하게 떠오르는 영상들, 그러나 단어로 발설하지 못해 연상되는 주변 것들을 일일이 헤는 증상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혹시, 이것이 치매는 아닐까 걱정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건망증」에서 보게 되는 화자의 태도는 일상에서 ‘건망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살다 보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다가 찾게 되는 물건·정신적인 것들도 많이 있다. 어찌 보면 이런 것들은 큰 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경우가 많아 “잊어버려도 좋다”는 화자의 의견에 공감하게 된다. 무엇보다 종장의 “잊어서/ 비워진 거기/마음자리 넓이만큼”에서 주는 여운이 크다. 후면에 말줄임표를 쓰지 않았지만 이 문장이 더 많은 생각을 이끌어 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물질이든, 정신이든 비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알고 있던 말들을 조금씩 잃어가는 증상도 어쩌면 말을 줄이고 생각을 넓히라는 세상의 경고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건망증」은 초장, 중장, 종장 한 문장씩 떼어놓고 보더라도 완성도를 갖고 있어 삶의 철학이 듬뿍 담겨 있는 품이 큰 시 임을 알 수 있다.(표문순 시인)
표문순
2014년 《시조시학》신인상 등단, 시집 『공복의 구성』,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열린시학상, 나혜석문학상 등 수상, 문학박사 졸업(한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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