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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나는 있다』 시인수첩시인선으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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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4. 2. 2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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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과 없음, 혹은 존재의 근거와 양상

 

 

김네잎 기자

 

월간 심상으로 등단한 이정란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나는 있다를 시인수첩 시인선으로 출간했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까지 전통적인 시적 문법에 의지해 외부의 사물과 풍경이 촉발하는 정동과 인식의 변화를 그렸다. 그러다 세 번째 시집 눈사람 라라에서부터는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와 같은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의미의 세계에서 일탈해 콜라주와 몽타주에 의해 형성되는 이미지의 날카로운 충돌과 카오스의 질서를 향했었다.

 

이번 시집에서는 나는 있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존재(Sein)의 양상과 그 근거들에 대한 시적 사유가 빛을 발하고 있다. 오랜 시간 묵히고 삭히고 발효시킨 시적 사유를 날카로운 이미지로써 함축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기존의 정동을 산출하는 이미지의 충격적 결합을 이어가면서 거기에 세계와 자아의 실재에 대한 탐색을 담아내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탐색의 주제는 존재와 부재의 실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없다는 것의 실재(the real)는 무엇인지,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이유와 존재 근거는 무엇인지 등의 자못 철학적인 사유가 펼친다.

 

황치복 평론가도 해설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시세계를 진단했다. “이정란 시인은 현상에서 촉발된 내적 정동의 세계를 그리는 전통적인 작시술과 결별하고 의미화되지 않는 이미지의 충돌과 기표의 물질적 효과에 주목하면서 작품(work)이 아니라 텍스트(text)로서의 미학적 현대성을 추구하는 시인이다. 또한 의미와 메시지의 시가 아니라 무질서한 세계의 풍경이라든가, 시적 주체에 의해 통제되는 코스모스의 정연한 세계가 아니라 카오스가 형성하는 어떤 무늬라든가 경향성 등을 시화한다.”고 평했다.

 

시인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나의 시는 타자나 어떤 객체와의 관계보다는 내면의 소리를 많이 담고 있다. 관계의 시학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시학에 가깝고 경험보다는 인식에 기대 있다. 잠자는 환자를 조심스럽게 깨워 숨소리 좀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묻는 주치의처럼 내면에서 삐걱거리는 수많은 나를 건져내 들여다본다. 그래서 나는 시를, 수많은 를 깨워 듣는 낯선 숨소리라 생각한다. 낯선 숨소리는 많을수록, 어긋날수록 풍성해진다. 논리 없이 중심 없이 흩어질 나를 꺼내놓는 일이 나의 시 쓰기이며, 수많은 가 바깥의 객체들을 만나는 순간 무한하고 낯선 세계에 접속된다.”(시인수첩, 2023년 겨울호)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건져낸 무수한 자아가 어떤 사유와 충돌해 어떤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는지 자못 궁금해지는 진술이다.

 

나는 있다가 그렇다고 심오한 철학적 사유를 겉으로 드러낸 시집이 아니다. 현상적으로 그것을 암시할 뿐이다. 현상이 앞서고 사유가 그림자처럼 따라붙기에 가독성엔 문제가 없다. 오랜만에 있음과 없음, 혹은 존재의 근거와 양상에 관한 매력적인 시적 형상을 만나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시집은 의미있게 다가갈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나는 있다

 

이정란

 

땅 어딜 밟아도 벨이 울렸어

어딜 파도 까만 씨앗이었어

 

새싹은 지축을 흔든 후 혼돈에 빠졌지

 

말발굽이 지나가고 떨어져나간 목에

뒤엉킨 천둥벼락의 뿌리가 돋아났어

 

새끼 고양이의 이빨 같은 백설이

무한으로 꽉 찬 세상의 난청을 녹여주었지

 

영원을 사는 신의 이야기가 까무룩 낮잠이란 걸 알게 된 건

미지의 불 한 덩이 덕분이었어

 

한 점 내 안에서 출발한 우주가 폭발하고

 

먼지 하나와 맞물려 공중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

은하가 되기도 어둠 한 알갱이의 고립이 되기도 했지

 

하늘은 마음을 펼칠 때마다 열렸다 닫혔다

 

미래의 옆구리에서 떨어진

내 몸은 신의 언어

 

시간의 톱니바퀴에 부서져 내릴수록 신은 미지에 가닿고

 

비어 있음으로 시작되는 중심

 

나는 지금 수십억 년 동안 나를 빠져나가는 중

 

무심히 지나가기만 해도 튀는 시간에 휘청이며

이정란, 나는 있다시인수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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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무

 

이정란

 

무무는 갈 곳 몰라 모르는 곳으로 간다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다

 

무무는 없어지기 위해 애를 쓴다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 모습을 보인다

 

그에게 붙일 이름과 의미를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바치지만 무무는 스스로를

애벌레의 직전 나비의 직후라고 생각한다

 

태생이 없어 아무 말도 할 줄 모르고

눈코입이 없는 얼굴 몸이 없는 몸을 가졌다

 

만지는 이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졌다 곧장 사라지는 무

 

터미널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바람 같을 때도

한칼에 내 몸을 두 동강 낼 때도 있다

 

자기가 낳은 무를 묵묵히 썰고 있는 무무에게

훈수를 두기도 하지만

배우는 존재가 아니므로 뇌는 없는 것에 가깝다

 

있는 것에서 멀어지느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찾지 않을 때 불현듯 보이는 그를 아예 잊어버리자

 

없는 존재라고 나를 짓누르기 전에

도처에 이르러 바람의 줄기세포로 반죽되기 전에

이정란, 나는 있다시인수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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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이정란

 

어디선가 한 물질이 왔다

 

그 물질이 감자의 생각에 닿아 싹을 틔운다. 싹은 감자를 둘러싼다. 처음의 감자는 썩어 없어진 채 여기 있다

 

싹은 꽃과 낙화를 동시에 품는다. 꽃은 느낀다, 몸을 간지럽히는 게 주어진 최대치의 사랑이란 걸. 나비는 꽃을 첫눈에 알아보기 위해 태어난다

 

감자를 심은 건 물, 물은 형태를 바꾸며 감자를 지나고 물을 건너 감자 바깥으로 나간다. 감자의 생각도 물길 따라 갈라지고 이동한다

 

최초의 싹과 감자가 가장 멀리 있을 때 꽃이 감자를 연다. 꽃은 다른 감자를 보려는 눈. 눈물을 통해 낯선 세계가 보일 때 꽃은 감자를 닫는다

 

감자는 감자가 되기 위해 낙화를 물고 뿌리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가 중심을 분해하고 생각을 녹인다

 

감자에 땅이 나고 하늘 나고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이정란, 나는 있다시인수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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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나는 있다』 시인수첩시인선으로 출간 - 미디어 시in

김네잎 기자 월간 『심상』으로 등단한 이정란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나는 있다』를 시인수첩 시인선으로 출간했다. 시인은 두 번째 시집까지 전통적인 시적 문법에 의지해 외부의 사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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