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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길숙 시인의 첫 시집 『아무렇게나, 쥐똥나무』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4. 3. 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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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두 시간 만에 전격 계약한 특급 유망주의 개성과 직관이 가득한 시들

 

 

하린 기자

 

2017문학사상으로 등단한 박길숙 시인의 첫 시집이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되었다. 오랜 습작 기간을 거쳐 등단한 박길숙 시인은 등단 당시 이미, 완성형의 신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2011부산일보신춘문예 최종심을 맡았던 정진규 시인은 차점자였던 박길숙 시에 대해 발랄한 감각과 자유분방한 보폭이 흥미로웠다고 밝히며, 박길숙 시의 큰 덕목으로 새로움의 추구를 꼽았고, 2017문학사상신인상 심사위원들은 현실을 시의 성채 안으로 이끌어 오는 힘을 갖췄다며 그를 제70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의 당선자로 결정했다.

 

아무렇게나, 쥐똥나무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안고 탄생했다. 박길숙 시인이 이메일로 한 권의 시집 분량의 작품을 출판사에 투고하였는데, 마침 이를 받아본 시인의일요일 편집주간이 너무나 작품이 좋아서 그 자리에서 시집 출간을 결정했다고 한다. 투고한 지 불과 두 시간만의 결정이었다. 편집주간은 다른 출판사에 이 원고를 빼앗기기 싫어 서둘러 결정을 내렸다며 선고위원들의 양해를 구했는데, 이후 박길숙의 투고 원고를 돌려본 선고위원들도 하나 같이 남 주기 아까운, 보석 같은 원고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박길숙의 시는 견고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대단히 개성적이고 독창적이다. 일군의 신인들처럼 날것의 이미지를 서툴게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리한 사회의식과 자신만의 새로운 감각을 투영하여 한 편의 시로 완성시킨다.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타율성과 내부로부터 주장되는 자율성의 혼류하면서 태어나는 새로운 감각이, 바로 박길숙 시의 매력 혹은 마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의 모던한 이미지들은 자본주의의 반영 또는 투영에 의해 형성된다. 화자는 자본주의의 주술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주술을 내파하는 언어를 구사한 채 자본주의의 실체를 직관적 시선에 의해 포착한다. 자본주의가 갖는 현상적 균열을 내파하는 시인의 힘은 상자에서 태어난 인형”, “피와 살이 없는 너는 마론 인형”, “바닥부터 알아채는 눈치 빠른 인형”(상자들)과도 같은, 원초적 과거의 기억에 뿌리내리고 있다. 시인은 과거의 원초적 이미지로써 현재(자본주의)의 주술을 정지시키는 변증법의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기존의 자본주의 비판 시들과의 차이를 드러낸다.

 

2024년에도 시인들의 첫 시집들은 많이 탄생할 것이다. 첫 시집이라는 이 갖는 의미는 새로움과 진정성 있는 사유가 결합될 때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개성과 직관에 의해 나타난 진중한 감각을 펼칠줄 아는 박길숙의 첫 시집은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읽을거리로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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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검정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

 

박길숙

 

단추 세 개를 다 채우면 이 시간은 금방 사라질 거예요

어머니 너무 슬퍼 마세요

문밖은 전쟁이에요

안으로 어서 들어가세요

나는 봄을 파는 소녀

군인들은 내 위에 올라선 화르르 봄을 무너뜨리고 있어요

나비가 바덴산 너머 경계에 앉았어요

구름은 시간을 몰고 가고 저녁은 물소리를 내며 내려앉아요

물비린내가 저녁을 물들이고 있어요

아래 단추 두 개만 남았어요

저녁의 수염 위로 고양이가 내려앉아요

균형을 잃은 저녁이 기울어지고 있어요

동쪽부터 깊어지는 저녁의 온도, 이제 단추 하나가 남았어요

아직 블라우스는 다 입지 못했는데 동생들 눈에서 비린내가 나요

나비가 나타나 안대처럼 눈만 가려도 좋겠어요

나는 봄을 파는 처녀, 저녁에도 겨울에도 봄을 팔고 있대요

검정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

어머니, 나를 위해서 울지 말아요 마지막 단추를 채울 때까지

달 꼬리를 물고 가는 어둠 속으로

지붕 위 놀란 고양이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 타앙, 타아앙

 

내가 말했잖아요 문밖은 전쟁이라고

어서 문 안으로 들어가세요

이제 단추는 그만 채워도 되겠어요

박길숙, 아무렇게나, 쥐똥나무, 시인의 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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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숲으로 가요

 

박길숙

누가 내려준 것입니까 여왕이라는 칭호

앞치마를 두르고 카레여왕을 젓습니다

양파는 말이 없고 당근은 길듭니다

브로콜리를 산 채로 집어넣자 양말도 신지 않고 달아납니다

대리석에 얼룩이 남았습니다

무엇으로 지워야 할까요 오늘의 기억은

 

루마니아산 초록 드레스를 입고

에나멜 붉은 구두를 신습니다

달아난 브로콜리를 잡으러 숲으로 가요

구두 굽은 자라나고

스커트 안으로 모여든 바람에 몸이 날아오릅니다

목주름을 감추려 구름을 두릅니다

 

구름을 흔들어 눈을 내리면

눈길을 걸어가는 발자국이 있습니다

 

흰 체육복이 얼굴보다 붉게 물들어 버린 날

휴지 뭉텅이를 돌돌 말아 아랫도리에 꼭 여민 아이

젖은 바지 속에서 불안은 번져 가는데

아이가 지나가는 눈 위에는 동백꽃이 피어납니다

 

굴 같은 울음을 뭉텅이로 쏟아 내면 악몽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아

 

초록 드레스를 벗어 열두 살 어린 나에게 입혀 줍니다

 

숲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면

그건 누구도 아닐 거예요

동백꽃 얼룩 위를 달리고 있는

브로콜리 가쁜 숨소리일 겁니다

박길숙, 아무렇게나, 쥐똥나무, 시인의 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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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범창

 

박길숙

 

작은 창에는 창살이 있네

우리 대화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언덕 위 허물어지는 해바라기가 있네

언니야 나 저 꽃이 갖고 싶어

언니는 언덕을 붙잡고 시든 해를 꺾어 오네

 

언니가 만든 빨래집게가 양은 밥상 위 시간을 붙잡고 있네

돈 많이 벌면 예쁜 엄마와 친절한 학교를 사 줄 테야

은색 고리로 은귀걸이를 만들고 빨간 집게로 비행기를 만들지

파란 집게를 연결하면 기차처럼 시간은 늘어지네

얼룩, 얼룩, 울 언니는 자주색 가죽가방

언니가 새로 생긴 무늬를 보여 주며 스케치북을 내미네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나는 창에 기대어 침을 뱉지

나보다 먼저 무럭무럭 자라는 창살

파스텔 색깔이 곱게 퍼진 눈 위로 찢어지지 않기 위해 물이 드네

언니의 낮달이 눈썹처럼 걸렸네

나는 까만 크레파스로 검은 달을 만드네

판다가 된 언니, 웃네 울 언니가 웃네

해를 꺾어 시든 밤

언니는 지퍼를 열고 나를 담네

박길숙, 아무렇게나, 쥐똥나무, 시인의 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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