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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0 _ 이정환의 「폐타이어에게」

시조포커스

by 미디어시인 2024. 5. 7.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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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타이어에게

 

이정환

 

몸의 일부는 이미 먼지가 되어 버렸을

 

마구 휘감기어 닳던 어두운 길의 흔적

 

둥글게 말아 올리며 밤 불빛에 떨고 있다

 

만근 쇳덩이에 눌린 시간의 무덤인가

 

무수한 욕망이 솟구치다 까무러치고

 

먼 길을 짓쳐나가던 근골마저 바스러진다

 

세상 떠받치던 힘 스러져간 자리마다

 

살엘 듯 파고드는 이른 새벽의 냉기

 

지하도 한켠을 떠도는 기침소리 듣는다

 

이정환,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만인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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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날마다 생산되는 새 상품을 즐기기 위해 어제의 물건들을 습관처럼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늘의 물건을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질서와 혼돈이 뒤섞인 도시의 진짜 얼굴을 궁금해하는 이는 없다. 버려지는 물건의 부피는 점점 더 커지고 있지만 정작 폐기된 잔해물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탐욕의 늪으로 빠져든다. 버려진 물건은 과도한 소비문화와 물질주의 사회에서 무대 위에 숨겨진 어두운 진실이 되었다. 눈부신 불빛 아래 화려하게 펼쳐지는 도시는 마치 곡예단 공연처럼 즐거움을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는 잠재된 위험과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버려질 것을 자신의 집 앞에서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밀어내려 한다. 감추거나 은폐해왔던 쓰레기는 이제 양극화된 이중성을 드러냄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정환 시인의 시 폐타이어에게는 한때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져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하나의 단상을 묘사한다. 온갖 먼지로 뒤덮인 폐타이어는 쓰임을 다한 존재가 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한 폐타이어의 정체는 밖으로 혹은 아래로 끊임없이 밀려나고 있다. “만근 쇳덩이에 눌린 시간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지난날의 기억은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한때 마구 휘감기어 닳던 어두운 길의 흔적속에서 무수한 욕망이 솟구치다 까무러치기도 했던 폐타이어는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적막을 깨는 울음을 터뜨린다.

폐타이어는 고독한 노인의 모습으로 겹쳐진다. 과거의 영광과 활력을 잃고 쇠퇴한 노년의 무너짐이 밤 불빛에 떨고 있는 무력한 대상으로 비친다. “먼 길을 짓쳐나가던 근골이 신음하며 살엘 듯 파고드는 이른 새벽의 냉기”, 이 극심한 추위는 쓸쓸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한다. “지하도 한켠을 떠도는 기침소리가 주변의 냉랭한 벽과 어둠에 반향하며 외로움을 증폭시킨다. 계속해서 시간이 이미지에 앞선 밑그림을 그린다. 일부가 아닌 것, 그것은 생산과 생산성으로부터 배설되는 찌꺼기처럼 우리를 등 떠밀기도 한다. 하지만 폐타이어는 결코 절망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소외와 억압에 대한 저항은 혐오와 매혹 사이의 자유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반격의 날을 세우고 버려진 것들의 겹을 읽고 있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10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 선정, 2022년 아크로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0 _ 이정환의 「폐타이어에게」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0 _ 이정환의 「폐타이어에게」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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