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2 _ 이승은의 「자정 무렵」

시조포커스

by 미디어시인 2024. 6. 29. 11:36

본문

 

자정 무렵

 

이승은

 

안과 밖의 경계를 왼 종일 지켰다고 담장을 쓸어주는 나뭇잎 그림자들, 달빛도 제 몸을 풀어 골고루 덮어준다

 

희붐한 달무리 아래 방백 같은 나무의 말, 조붓한 창틈으로 내가 듣고 말았어

수백 년 살아냈지만 같은 날은 없었다고

― 『분홍입술 흰뿔소라, 작가, 2024.

 

-------------

 

자정子正은 지나온 하루와 새로 시작된 하루가 만나는 경계에 놓여 있다. 수백 년을 살아낸 나무의 방백에 의하면, 수많은 자정을 지나오는 동안 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한다. 새로 시작되는 하루는 지나온 날과 같지 않다. 이 말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라는 주체의 조언이기도 하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고, 오늘과 같은 내일은 없으니 가치 있게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날이 바뀌는 자정子正은 음과 양이 함께 머무는 시간이다.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흐르는 시간은 늘 변화를 가져온다. 이것은 자정 무렵에 확연하게 느껴진다.

12지지地支 중 자시子時가 첫 번째인 까닭은 자시子時에 생명이 잉태되는 것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는 수정란受精卵의 상태로, 모태母胎의 자궁子宮에 착상되어 처음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에 놓여 있다. ‘는 모든 생명의 시작이자 시초이다. 가장 작고 보잘것없으며, 어둠 속에 감춰져 있고, 아직 형태를 온전히 갖추지 못했지만,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을 품고 있는 종자種子(씨앗)와 같다. , 아직 태어나지 못했지만 생명이 움틀 준비가 되어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정子正은 세상의 끝이자 처음이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존재의 시작을 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물론 자정은 한밤중이란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인간이 신체활동을 하기가 가장 불편하고 어려운 시간대이면서,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경계선이다. 우리는 이 경계선을 쉼 없이 지나며 새로 태어난다. 불교에서는 자정에 즈음하여 종을 울리며 수행에 임하고,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자정미사를 봉헌한다. 끝이자 시작인 자정은 뭇 생명들이 거듭 태어나며 삶의 충동Eros’이 충만해지는 시간이다. “안과 밖의 경계를 왼 종일 지켰다고 담장을 쓸어주는 나뭇잎 그림자들제 몸을 풀어 골고루 덮어주는 달빛도 또 하루의 문을 열어준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대명사들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2 _ 이승은의 「자정 무렵」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2 _ 이승은의 「자정 무렵」 - 미디어 시in

자정 무렵 이승은 안과 밖의 경계를 왼 종일 지켰다고 담장을 쓸어주는 나뭇잎 그림자들, 달빛도 제 몸을 풀어 골고루 덮어준다 희붐한 달무리 아래 방백 같은 나무의 말, 조붓한 창틈으로 내가

www.msiin.co.kr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