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수만 사는 마을
—무등이왓 팽나무*
임채성
자동차 불빛에도 소스라쳐 잠을 깬다
마른번개 번쩍이던 삼밭 구석 우영밭이
대지른 군홧발 아래 묵밭이 된 그날부터
곡조차 할 수 없는 무등이왓 이웃들이
큰넓궤와 도엣궤로 밤도와 떠날 적에
먼발치 도너리오름도 몸을 잔뜩 웅크렸다
외줄기 섬광처럼 어둠을 찢던 비명
개 짖는 소리마저 불타버린 마을에는
칡넝쿨 환삼덩굴이 옛 자취를 지우고
꽃샘 잎샘 지난 봄날 잎 다시 푸르러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늘에서 쉬던 이들
무너진 돌담 너머로 까치놀만 우련하다
* 제주 4·3 당시 중산간마을 소개작전으로 파괴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의 자연마을인 무등이왓 터에 홀로 서 있는 수령 약 500년 된 팽나무.
—임채성, 『메께라』, 고요아침, 2024.
----------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들의 투쟁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다.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외침을 되새기는 일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과제를 풀어가는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되짚는 것만으로 역사를 다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라는 순간은 역사라는 당연한 명제로 출발하여 끊임없는 질문과의 만남을 통해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살피면서 미래를 향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임채성 시인의 시 「보호수만 사는 마을 - 무등이왓 팽나무*」에서 우리는 제주 4·3 사건의 아픈 역사가 남아있는 비극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당한 마을의 고통과 상흔은 팽나무를 통해 확인된다. 1948년 11월, 약 130여 가구가 빼곡하게 들어선 동광리 무등이왓 작은 마을에서 참혹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토벌대가 들이닥쳐 마을이 모두 불타버렸으며 1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마을에는 당시의 참상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자동차 불빛에도 소스라쳐 잠을” 깨는 참사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생생하다. “마른번개 번쩍이던 삼밭 구석 우영밭”, “대지른 군홧발 아래 묵밭”이 된 광경은 학살 당시와 학살 이후의 황폐해진 마을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곡조차 할 수 없는 무등이왓 이웃들”은 극심한 암흑 속에서 불안감에 휩싸인다.
“큰넓궤와 도엣궤로 밤도와 떠날 적에” 사람들은 학살을 피해 숨어 다녔고, “먼발치 도너리오름도 몸을 잔뜩 웅크렸다”. 무등이왓 마을 주변의 자연까지 가혹한 시기를 보내면서 절망에 떨었다는 표현은 진저리가 날 정도로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그날의 기억은 마을 주민들의 삶에 큰 변곡점이 되었다. 무심하게도 세월이 흘렀지만 “개 짖는 소리마저 불타버린 마을”에서 생명의 자취를 찾기는 어려워졌다. 가족들이 학살 당하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생존자들은 겁에 질려 무등이왓 마을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칡넝쿨 환삼덩굴이 옛 자취를 지”워갔다. 마을의 아픈 기억도 점점 희미해졌다. 그러나 “꽃샘 잎샘 지난 봄날 잎 다시 푸르러도” 학살당한 사람들이 넓직한 그늘 아래서 쉬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묵직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참극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은 팽나무 한 그루. 나무의 깊은 뿌리는 가장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역사를 증언하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틴다. 폐허가 된 황량한 마을에 우뚝 솟은 팽나무 한 그루가 이제 무등이왓터의 오롯한 희망이자 재생 버튼이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제10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 선정, 2022년 아크로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2 _ 임채성의 「보호수만 사는 마을—무등이왓 팽나무」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2 _ 임채성의 「보호수만 사는 마을—무등이왓 팽나무」 - 미디어
보호수만 사는 마을—무등이왓 팽나무* 임채성 자동차 불빛에도 소스라쳐 잠을 깬다마른번개 번쩍이던 삼밭 구석 우영밭이대지른 군홧발 아래 묵밭이 된 그날부터 곡조차 할 수 없는 무등이왓
www.msiin.co.kr
#임채성시인 #임채성시집 #메께라 #고요아침 #김보람시인 #김보람시집 #미디어시인 #미디어시in #시조포커스 #시조시각 #하린시집 #하린시인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23 _ 임성구의 「왔다 그냥 갑니다」 (0) | 2024.08.07 |
---|---|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3 _ 한혜영의 「자연에서 배우다」 (0) | 2024.07.26 |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22 _ 이남순의 「빈병」 (0) | 2024.07.07 |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2 _ 이승은의 「자정 무렵」 (0) | 2024.06.29 |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1 _ 정수자의 「여행의 표정」 (0) | 2024.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