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
창작과 지도를 병행하는 하린 시인이 네 번째 시집 『기분의 탄생』 (시인의일요일)을 출간하면서, 2024년 6월 28일 신도림역 가온대회의실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주관: <미디어시in>, 후원: <시인의 일요일>) 시인은 주요 인터넷서점의 ‘시 쓰기’ 분야에서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는 『시클』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의 저자로, 실제 창작과 창작이론의 경계에서 모범적인 시 세계를 펼치고 있다.
하린 시인은 2008년 《시인세계》로 등단했다.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시창작연구서 『시클』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평론집 『담화 구조적 측면에서의 친일시 연구』 등이 있으며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와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을 맡고 있다.
등단 이후 활달한 상상력과 탄탄한 언어 감각으로 개성 있는 시세계를 펼쳐온 시인은,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우리 사회에서 배제되고 제거된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시로 형상화해 낸다. 시인은 청소년, 이방인, 노동자, 연습생, 알바생, 가장, 세입자, 택배기사들이 내는 비탄과 좌절과 치욕과 비굴과 자책과 눈물의 목소리를 시의 육성으로 우리에게 더욱 생생하게 들려준다.
하린 시인은 그의 시가 지닌 장점인 거침없는 언변과 대담한 사유로 “제도적 인정과 인준의 회로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선명하고 감각적 이미지들로 새롭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사회 모두가 알아야 할, 사회적 모순의 시스템을 함께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삶의 비애와 진실이 담긴 쓸쓸한 풍경을 경쾌한 리듬으로 변주하며 중첩하는 시인의 시적 시도는 우리 현대시의 또 다른 쾌거라 할 만하다.
해설을 쓴 오민석 평론가의 분석대로 시인은 서발턴의 입장에서 서발턴의 감성을 정확하게 그려 낸다. “자학”, “자책”, “수치심”, “비굴” 같은 정서들은 하나같이 갑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을의 것이다. 이런 정서들은 한결같이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다 내 잘못이니까”라는 고백은 지식인 하린의 고백이 아니라 보편적 서발턴의 목소리이다. 서발턴의 목소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주석도/ 프롤로그도/ 에필로그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목받지 못”한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안쪽을 이해했을 뿐”이라는 발언은 문제의 모든 원인을 자기 내부에 돌리고 그 너머까지 나아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서발턴의 자기 고백이다. 하린은 이와 같은 미적 허구-형식을 동원해 서발턴의 목소리를 서발턴의 한계까지 담아내며 절실하게 살려낸다. 개념적 이론이 아닌 미적 형식의 살아 있는 힘으로 시를 쓴다. 독자들은 시인의 1인칭 허구-형식을 통하여 현대판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된 서발턴의 비탄과 좌절과 치욕과 비굴과 자책과 눈물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시인의 북콘서트는 뉴스페이퍼 이민우 대표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중앙대 이승하 교수를 비롯해 각지에서 활동하는 많은 시인들의 축하로 마무리되었다. 시인은 그동안 출간한 시집의 시세계를 차례로 언급하며 시대적 통점과 불합리, 타자와의 관계, 내밀한 자아의 이야기를 시인만의 시적 언어로 진술했다고 고백한다. 향후 몇 번의 북콘서트와 특강을 계획 중이라는 시인의 성취와 업적이 더욱 만개하길 바라면서 시집 속 시 몇 편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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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기분의 탄생
—눈사람
하린
어떻든 사람입니다
천사가 아닙니다
마당이거나 골목이거나 언덕이거나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랫목은 어디입니까
고드름은 왜 생깁니까
그것이 궁금하다면
당신은 백색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주관성을 부여받았습니다
눈 속의 눈이 생길 수 있고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많은 감정이 없습니다만
특별한 비밀이 있습니다
적막과 대면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뼈와 살과 피와 심장과 마음이 하나라는 착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길고양이를 찾아 나설 참입니다
나를 보고 놀라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어볼 것입니다
벌벌 떨고 있는
배고픈 새끼 고양이를 만난다면 처음으로 울 것입니다
그만 녹아 흐를 것입니다
머리가 재빨리 심장에 달라붙어 기형이 되어 무너질 것입니다
전이일까요
자리바꿈일까요
끝까지 실패만 하는 생이란 없으니까
수평이 된다고 끝이 아닐 겁니다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누군가 그리운 겨울엔 기필코 사람입니다
—『기분의 탄생』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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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탄생
―하수구
하린
넌 오백 년도 넘은 하수구 같아
마지막에 애인이 남긴 말입니다
밖은 봄인데
하루 종일 하수구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외눈박이 괴물
냄새와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안쪽엔 무엇이 들러붙어 있을까요
당신과 내가 싸울 때 했던 말들과
나를 못 견뎌서 토해낸 당신의 본성과
나의 못난 자책이 살고 있겠지요
저 깊은 곳에
소화기관이 있다면
매일 속 쓰림과
역류성 뒤틀림을 앓고 있겠지요
바라건대
당신에게 했던 악취 나는
나의 변명과 불만과 불안을 잊어주세요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나의 무능과 무감과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명분을
오늘도 흘려보냅니다
도시의 하수도는 다 연결되어 있을 테니
하수관을 통해 당신이 사는 곳에 닿을 수 있을까요
난 참 꽉 막힌 하수도처럼 여태 살았습니다
—『기분의 탄생』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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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의 탄생
―날짜 변경선
하린
떠나기 싫은데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최후와 최선이 뒤섞입니다
기억을 안다고 하는 순간 달아나는 기억이 있습니다
매번 마지막이고
매번 처음인 자리
연애도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어제의 발목이 오늘의 발목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질문이 넘나듭니다
날개는 혁명입니까
너머는 새롭습니까
정착은 기쁨입니까
난 왜 마침내 당신과 내가 헤어진 양수리입니까
지구는 둥급니까
누군가 돌아온다는 약속이
왜 깡통처럼 굴러다닙니까
이곳이 사라지면
그곳이 된다고 확신한 당신을 위해
달력을 찢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수만 마리 새떼 속
한 마리 새처럼
난 점점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기분의 탄생』 시인의일요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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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에 대한 역설
하린
건물은 비상구를 전부 갖고 있는데
사람만 갖고 있지 않다
아니다 누구나 비상구가 있다
그저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스스로 폐쇄시키거나 열지 않는 사람들
그중에 한 명은 기필코 내 어머니다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처럼
어머니는 어머니를 끝까지 탈출하지 않았다
평생 누군가의 비상구만 되어 준 이력
어머니의 등엔 날개가 없었다
아니 펴지 않았다
마음속 비상구를 한번도 들키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나는 궁금했다
비상구가 처음으로 열린 걸까
마침내 닫힌 걸까
—『기분의 탄생』 시인의일요일, 2024.
하린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북콘서트 성료 < 현장+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하린 시인의 네 번째 시집 북콘서트 성료 - 미디어 시in
이미영 기자 창작과 지도를 병행하는 하린 시인이 네 번째 시집 『기분의 탄생』 (시인의일요일)을 출간하면서, 2024년 6월 28일 신도림역 가온대회의실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주관: , 후원: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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