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시인
2001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곰곰』 『이별의 재구성』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깊은 일』 등의 시집을 출간하며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해 온 안현미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미래의 하양』을 걷는사람시인선으로 발간했다.
구원 없는 세계에서 삶의 비애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던 안현미 시인이 이번 시집에선 이전 시에서 보여 준 언어유희, 부조리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비극, 전망 없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시적 모험을 보다 극대화된 방식으로 보여 준다. 완전한 절망과 죽음의 상태에서도 비극에 함몰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화자를 통해 ‘하양’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미래를 보여 주려는 양상을 드러낸다. 그러한 특징을 알아본 박장호 시인은 안현미의 시에 대해 “들숨과 날숨, 구원 없는 불행과 부조리,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고, “아픈 유희의 극치”라고 언술했다.
안현미의 시적 화자는 현실과 초현실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시를 쓰기 위해, 혹은 생을 견디기 위해 죽은 사람으로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시인으로 되살아난다. 시인으로 되살아남으로써 죽은 사람으로 출근할 수 있고, 죽은 사람으로 출근함으로써 시인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순환 고리 속에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초현실인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들에 자연스럽게 던진다.
첫 시집에서부터 줄곧 안현미를 따라다닌 코드 중에 하나는 가난과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는 가난과 운명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고 부끄러워하며 죽지도 않을 계획”(「사과술」)을 가지고 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그는 한 항아리의 사과술을 담그며 술에 취해 잠들 수 있는 시적 여백을 품는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거짓말을 타전하다」, 『곰곰』)던 표현처럼 그는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존재로 살아왔지만, “낯설고 두려운 세계”에서 “내 불행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맞선다.
안현미는 『미래의 하양』을 통해 중견 시인으로서 깊이와 여유와 감각을 동시에 품는 면모를 보여 준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탁구를 칩니다. 주고, 받고, 받고, 주고, 단순하고 정직한 게 마음에 듭니다. 승부를 가르면 대부분 지지만 가끔 이기는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탁구공도 지구도 둥글고 둥근 것들은 예상 밖이고 예상 밖은 가끔 몹시 아름다운 때도 있습니다.”(「시인의 말」)라고 말하며, 미학적 행보를 진솔하게, 진중하게 이어갈 것임을 암시한다.
삶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그런 삶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 상태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삶의 본질을 풀어나가는, 시를 읽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안현미 시인의 『미래의 하양』은 의미 있는 읽을거리로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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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한때 시간만이 신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이 침묵도 종내에는 나와 함께 시간 밖으로 날아가리란 믿음의 신도로 어떤 밤엔 술에 취해 잠들고 어떤 밤엔 술을 담그다 잠들었다 어떻게든 흘러가리라 그것이 딱 내 수준이었지만 내 수준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고 부끄러워하며 죽지도 않을 계획이다 시간은 신에게로 날아간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신에게로
―「사과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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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이불 쓰고라도 욕도 내뱉으라고 당신은 지금 감기 걸린 여자가 아니라 탈진한 여자라고 슬픈 여자가 아니라 아픈 여자라고 100평짜리 폐를 가졌으면서도 모기만큼 숨을 쉬니 그렇다고 그러다 죽는다고 숨통을 틔우라고 그랬다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잘못 태어난 게 아니라 잘못 꿈꾼 거라면, 좋겠다고 모기만 한 소리로 그랬다
―「여의사」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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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찍고 싶었으나 귤을 찍는다
인생이 대개 그와 같다.
호불호를 떠나야 한다
여자도 남자도 극복해야 한다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초대된 우리들
내 불행은 내가 알아서 할 것
대게는 대게로
고양이는 고양이로
나는 나로 죽을 것이다
할머니라고 아홉 번이나 불렸고
삼만 살처럼 피곤해도
소만(小滿)에는 립스틱을 사자
동문하고 서답하자
내 물음과 내 울음은 내가 알아서 할 것
―「뛰어다니는 비」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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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쓰듯이 눈물을 과소비한 죄
깊이 있게 다정하지도 차갑지도 못한 죄
무해하지도 유해하지도 못했던 죄
물 쓰듯 눈물을 쓰면서도 끝내, 용서받지 못한 죄
[과출력 9단계 경보]
숨 쉬는 것처럼 눈물을 쓰고 있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될 일이다
버러지처럼 살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불행도 공공재야?
울음도 물음도 되지 못한
출처가 불분명한 눈물이 있다
―「눈물 경고등」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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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새가 눈물을 물고 동쪽 바다로 날아가는 꿈을 꿨다
울창한 구릉 속에서 흘러나온 암흑이 분지를 돌아 나온 바람과 몸을 섞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이 사무치고 있었다
더 이상 인간 가지고는 안 된다고 인간을 벗어 놓고 사랑마저 벗어 놓고 섬이 되고 있었다
폭풍이 오고 있었다 죽은 새가 미래와 하양을 물고 돌아오고 있었다
―「울릉도」 전문
‘하양’의 세계 안에서 물음과 울음 뒤섞인 시가 파도친다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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