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소월시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수상하며 오랜 작품활동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천양희 시인이 신작 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창비, 2024)를 출간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삶의 고독을 눈부신 서정의 언어로 승화시키며 굳건히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 온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존재의 본질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다.
고통과 번민으로 가득 찬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에 대해 시인은 자신만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사유하면서 존재가 가진 이면을 뭉클하게, 간절하게 그려낸다. 고독과 슬픔을 형상화를 함에 있어서 “숭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을 담아 “아름답고 융융한 예술적 사유”(유성호, 해설)로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양희의 시를 읽다 보면 시 속 정황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고 화자와 동일화되어 삶을 반추하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시편마다 고통과 슬픔을 직시하고 껴안는 화자의 발화는 지독하게 고독한 세계에서 “끝 모를 간절함”(「삼분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시춤’을 아름답게 추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다.
이과 같은 시적 성향은 “오랜 고통 끝에 이룩한 득음의 경지”에 비유된다. 천양희 시인이 이룩한 미학적 성취는 해설을 쓴 유성호 평론가의 말처럼 “한국 시의 찬연한 축복이요,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커다란 기쁨의 원천”에 해당한다.
천양희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언술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걸어온 60년 시의 길이/ 나에게는 가장 먼 길이었다/ 그 먼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돌아보니 그동안 나는/ 사람이 그리운 사람이었고/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중략) 단 한 편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 시인의 말이 될 것이다” 이 언술을 통해 우리는 천양희 시가 가진 세 가지 코드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질문이고 나머지 하나는 마음을 살리는 따뜻한 마음이다. 사람에 대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깊이 있는 시가 형성되고 그 시로 인해 우리는 마음의 위로와 삶의 긍정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천양희 시를 읽는 일은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진 지금―여기를 서로에게 보여주고 같이 위로받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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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미리 맛보기>
쓸데없는 쓸모
천양희
바람이 불 때마다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던 그가
눈앞에 없는 어제가 되었다
보이는 것들을 보면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깨 위에 얹힌 빗방울 보다
눈물방울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낀다
빗줄기가 정처 없이
낮은 데로 뛰어내린다 행자(行者)처럼
낙하(落下)란
착륙이 아니라 추락일 것인데
낙하산을 탄 것도 아닌데
그는 왜
배고픈 거미처럼 허공에다 줄을 댄 것일까
받아줄 바닥도 없는데
바닥은 낙하를 위해
태어난다는 말이 오늘은 옳았다
얼마 동안
죽음보다 슬픈 시간이 갔다
자신의 쓸모를 쓸데없이 버린 그는
내가 믿는 유일한 종교였다
나는 더 믿을 것이 없어 용서에 기댄다
내게 남은 유일한 쓸모는
내가 그의 유일한 신도라는 것이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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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람과 예순한편의 슬픔
천양희
한 시인이
슬픔은 어깨로 운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은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졌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오래된 슬픔은 향기를 품고 있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을 팔아서 자그만 꽃밭을 사야겠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 시인이
슬픔이 택배로 왔다고 합니다
어디서 왔는지 나이 먹은 슬픔이
오늘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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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생각하다
천양희
아침에 눈을 뜨면 시를 쓰지 않고는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가 생각나고 나는 시작(詩作)의 출발부터 시인을 포기했다 나에게서 시인이 없어졌을 때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김수영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은 깊게 생활은 단순하게 하라는 워즈워스가 생각나고 오늘 나는 아름다움에 인사할 줄 안다는 랭보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문학에서의 정치는 연주회장에 울리는 총소리와 같다는 스탕달이 생각나고 우리의 열망이 우리의 가능성이라는 새뮤얼 존슨이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움베르토 에코가 생각나고 나는 정의를 믿는다 그러나 정의에 앞서 어머니를 옹호한다는 카뮈가 생각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지막으로 돈! 천국 외에는 다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신문 배달 소년의 응모 시 한 구절이 아프게 생각난다 어둠은 빛보다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아침이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창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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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완창
천양희
바람이 짧게 강변을 지납니다 산그림자 길게 당겨보고 물새 발자국도 슬쩍 들춰봅니다 상형문자 같은 발자국들 새들도 때로 자국을 남깁니다 물살에 잠긴 저것이 흔적일까요 물은 흔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걸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기 저 물자리가 무량합니다 물뱀들 물방개들 물길 따라 놀고 온갖 잡풀들 물을 타고 있습니다 나는 잠시 물속에서도 잘 놀던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물속에선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갑니다 그것만큼 무심한 것이 더 있겠습니까 무심한 마음으로 무궁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곳에 산다는 건 자주 물 먹는 것이라던 친구의 말이 물보라 칩니다 물 같은 삶은 없는 것입니다 물속을 한번 더 들여다봅니다 눈 뜬 물고기들이 나를 빤히 올려다봅니다 물 먹고도 잘 살고 있다는 듯 물 흐르듯 살지 못한 내가 오늘은 물에 대해 수심 깊게 적고 말겠습니다 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에 대해 물의 내력에 대해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창비, 2024.
존재의 본질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고결한 시 세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존재의 본질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고결한 시 세계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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