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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연재 작가 이송희 시인 일곱 번째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4. 10. 28.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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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발랄한 영혼의 시를 쓰는 중견 시인

 

 

하린 기자

 

가람시조문학상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20회 고산문학대상 등을 수상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송희 시인이 일곱 번째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를 작가 기획시선 35번으로 출간하였다.

 

이송희 시인은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는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이 있으며,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등이 있다.

 

이번에 펴낸 이송희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는 모두 4부로 나뉘어져 총 64편의 시조로 구성되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 마음을 물들이고 싶다고 말한다. “시는 내게 다리 같고, / 낡은 책 같고, / 지울 수 없는 염료 같다는 고백이야말로 시인의 삶과 시 쓰기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일체(一體)임을 증명한다.

 

이번 신작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에서도 시적 화자는 어떤 대상을 응시하며 주관적인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반복하며 시를 쓴다. 눈에 들어온 사물과 풍경은 모두 화자의 개인적인 기억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된다. '배꼽'"내 울음의 뿌리"(배꼽의 둘레)가 되고, 내리는 비를 보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일기 속 우기)를 떠올린다. '몽유병'"네 이름 썼다 지운 자리"(몽유)로 명명된다.

 

화자는 '꽃꽂이'를 하면서 "당신의 젖은 혀를 단숨에 자른다/ 피투성이 잘린 말이 조각조각 쌓인"(꽃꽂이)다고 적는다. 화자의 주관을 통과 하면서 사물과 풍경들이 상기하게 만드는 것은 ''와 끝내 함께 할 수 없었던 '당신'과의 추억이다. 그리고 화자는 철길 위에서 읊조린다. 마치 철길처럼, 지금 ''와 당신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이정현 문학평론가는 발랄한 시들을 읽으면서 희미한 슬픔을 느끼게 되는 건 생의 필연적인 '어긋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 기억은 당신을 붙들지 못하고, 이 세계의 질주를 멈추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살아가야만 하는 자의 슬픔. 그것이 생의 비애라고 평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이 순간 어둠 속에서도 발랄한 영혼의 시를 쓴다. 시인은 그것만이 남루한 생을 위로할 방법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만 같다. 또한 시인이 몸과 영혼이 숨을 쉬며 시를 쓰는 이유일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화이트아웃

 

이송희

 

귓속에 맴도는 말이

모래알로 흘러내린다.

 

뭉크의 절규를 저벅저벅 걸었다

 

허방에 헛디디고 늪지에 빠진 발

 

경계가 지워진 곳에

덩그러니 몸만 남아

 

하얗게 물든 밤과 캄캄한 낮의 시간

 

그 속에 갇혀서 제자리만 맴돌던,

 

뭉개진 나를 꺼내어

기억을 두드린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작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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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문

 

이송희

 

네 얼굴은 수시로 표정을 바꿨어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한동안 어지러워서 한 곳을 맴돌았지

 

깍지 낀 연인들이 눈 밖으로 사라지면

 

가끔씩 멀리서 봄냄새가 흘러왔지

 

아침을 지나오다가 납빛이 된 네 얼굴

 

별들이 떨어져도 컵 속 물은 고요해

 

싸늘한 눈빛이 어제를 돌아 나올 때

 

모른 척 낯선 얼굴로 너는 또 문을 민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작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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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의 둘레

 

이송희

 

내 울음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았지

 

지하 방은 좁고 깊어 무엇도 닿지 않아

 

그림 속 낡은 둘레가

깃발처럼 펄럭인다

 

색이 번진 표정은 도무지 알 수 없어

 

맨 먼저 닿은 단어를 빵 속에 섞는다

 

거울엔

조각난 내가

맞춰지는 중이야

 

중심이 된다는 건 외로운 일이지

 

왜 나는 흩어지면서 내면을 겉도는 걸까

 

모르는 울음의 거처를

내게 다시 묻는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작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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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의 시간

 

이송희

 

당신은 비 오는 날 환승역을 지난다

 

지나온 길들을 손바닥에 새긴 채

 

미로로 들어서기 전

잠시 멈춘 발걸음

 

물에 젖은 계절이 표정을 바꾼다

 

흩어졌다 사라지는 구름 속 햇살처럼

슬며시 얼굴을 지운 흐린 내가 보인다

 

출입문 닫다가 잘려 나간 그림자

창밖의 배경은 어둡거나 쓸쓸해

 

끝없이 소곤거리며

멀어지는 검은 눈

 

바람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끊어진 길 위로 달려오는 환승 열차를

 

한 걸음 물러선 채로

하염없이 기다린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작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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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 책방골목

 

이송희

 

나는 다시 어두운 행간을 서성이네

걷다가 놓쳐버린 지난 세기의 구절들

 

불안을 뒤적이면서

손끝으로 길을 읽네

 

그 어떤 수식도 없이 간결했던 우리의 말

날을 세운 문장은 어디론가 끌려가고

먼지 낀 갈피 속에는 숨 죽은 목소리

 

골목 끝 마지막 장에 내간체로 살던 그가

빛바랜 문단 사이로 비틀비틀 걸어오네

그 시절 추운 언어를 부둥켜안고 우네

 

깨진 창문 안에는 몰래 읽던 역사책들

불온한 시대의 페이지를 접고 쓰네

 

서로가 참고문헌이 되어

길의 목록을 만드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작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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