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1991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선이 시인의 신작 시집 『물의 극장에서』가 걷는사람 시인선 117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따뜻한 서정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과 미세한 아픔의 결을 시적으로 포착했던 첫 시집 『서서 우는 마음』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다.
『물의 극장에서』는 정서와 사유의 깊이를 보여 주는 시집이다. 시인은 ‘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존재의 유동성과 변화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물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며 변화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시인은 이 속성을 통해 인간 존재와 감정, 삶의 불안정한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인간 존재의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의 정서적 교감을 섬세하게 그려내는데, ‘물’이라는 상징에 담긴 흘러감과 가변성은 표면적으로는 상실과 고독의 정서를 불러일으키지만, 심층적으로는 존재의 확장과 공감의 발견을 매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러한 ‘물의 극장’에 출연한 감각적 이미지와 절제된 정서를 관람하면서 여백과 울림으로 다가오는 사유의 깊이를 만나게 된다.
그러한 미학적 여정을 통해 이선이 시인은 생(生)과 사(死), 아(我)와 타아(他我)의 공존의 길을 발견해 간다. 그것이 이 시집이 가진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 세계를 두고 이문재 시인은 “‘피부 안’에 갇힌 감수성이 아니라 ‘피부 밖’으로 나아가는 감정 이입”을 일으키며, “타자와 하나 되려는 능동적 의지”를 드러낸다고 평한다. 그리하여 이 시집을 읽는 독자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모으는 소리 채집가”(「부스러기를 위한 노래」)를 자처하게 되고, “아무도 구원해 주지 않는 세계를 기억하”려고 기꺼이 “세이렌의 혀”(「머그잔에도 얼굴이 있다」)가 된다.
시집의 해설을 쓴 김나영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의 시적 주체가 마치 유리창처럼 “인간이 주도하는 일상과 신이 주재하는 삶을 매개하면서 그 안팎의 경계를 고발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러한 이선이의 시적 성취야말로 경계를 살아내는 자가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유리에 맺힌 슬픔”의 정서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진단했다.
이렇듯 시집 『물의 극장에서』 는 작고 사소한 일상의 세부(細部)를 포착하고 여기에서 사회 · 역사적 상처를 읽어내고 있으며, 개인과 세계를 연결하고 중첩하는 가운데 더 이상 번역할 수 없는 한국어의 에센스를 담아내고 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반쯤 먹다 남겨 둔 곰표 밀가루
봉지 열고 들어가
반죽을 개는 이 있으신지?
(중략)
보관기간 지나고도 찾아가는 이 없는 분실물처럼
싱크대 옆 서랍에 처박혀
마늘도 쑥도 없이
어떻게 허기를 견디시는지?
생활의 여분은 기억 저편에 모셔 두고
짐짓 모른 체하느라
가정용 다목적 박력분 슬픔을 버무려
곰돌이 푸를 만들고 계시는지?
―「생활의 발견」 부분
---------------
마당가
엊그제 입주한 감나무
허공만 바라고 서서
가난한 집 아기 젖 빠는 소리를 내며 꽃망울 밀어 올린다
달빛은 전입계 직원처럼 무심히 도장 찍고 가고
(중략)
참사(慘事)에 아이 잃고 이민 간 친구에게 죽은 아이가 여기 감꽃으로 피었다고
꽃 피니 이별도 견딜 만하다고 차마 쓰지 못하고
일찍 떨어진 열매가 남기고 간
햇빛이며 달빛 받아
시퍼런 멍들 온몸으로 열매 되어 가리라고
썼다 지우는
애기 감꽃 속
흰 무덤 하나
―「전입신고서」 부분
-----------
누군가 소리를 쟁여 두었다 한들 듣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이들이 낙엽을 밟으며 놀고 있다
공원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팽팽하게 포장해도 절반은 으스러지는 비애를 꺼내 먹기 좋은 곳
바사삭바사삭
출출한 시간의 허기 달래라고
가을이 우리를 공원으로 불러들이면
아이들은 마른 낙엽 찾아다니며 잎맥을 끊어 놓고
우리는 입술 앙다문 봉지를 열어
싹을 지키려 독을 품는 감자의 시간을 만지는데
심야배송 나갔다 쓰러진 채
지상의 마지막 송장(送狀)에 제 이름을 적었다는 그 손을 생각한다
꽃을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제 주검을 배송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정원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
바삭바삭
낙엽은 쟁여 둔 소리를 깨우느라 바스러지고
사방으로 퍼지는 소리의 비수들 공원의 심장을 찌르는데
감자칩 속에는
반송되지 않는 작은 정원이 산다
―「감자의 맛」 전문
내 몸에서 유독 귀만이 문 닫을 줄 모르는 24시간 편의점
밤낮없이 기도가 자라야 할 그곳이려니
국수처럼 순하고
버섯처럼 무른
무심을 버무려 도대체 무엇에 쓸까
이것은 들리지 않는 비명을 모으는 소리 채집가거나
내 나쁜 청력을 염려하는 난청 감별사일지도 모를 일
내 귀가 아직 열려 있다면
순순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가볍게 말하지 말아야 하리
―「부스러기를 위한 노래」 부분
-------------
3음절로 된 단어를 고르는 중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서 카르마
셋이 되었을 때 느끼는 어설픈 안정감
편안한 순간 끼어드는 초조함은 각자의 것
(중략)
담장 밑 자운영도 채송화도
봄을 다 치르고서야 건네받는 물 많은 복숭아도
단정할 수 없는 빛깔과 향기로 3음절을 고수하고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 그러나 다르마
셋이 모여도 일인용 베개 위에서
다르고도 같은 어둠을 베고 눕는다
이 사전에는 감정어가 지워져 있다
―「밤의 가족어 사전」 부분
감정 이입을 통해 야윈 비명들을 듣는 귀가 가진 매력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고여있는 시가 아닌 번져가는 시의 향연 (1) | 2024.11.18 |
---|---|
겹겹의 모순과 괴리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경쾌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주목해야 할 신인 (4) | 2024.11.11 |
본지 연재 작가 이송희 시인 일곱 번째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발간 (3) | 2024.10.28 |
존재의 본질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고결한 시 세계 (3) | 2024.10.22 |
‘하양’의 세계 안에서 물음과 울음 뒤섞인 시가 파도친다 (0) | 202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