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심리지도
김보람
고층 빌딩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처럼
칼날 같은 달을 품고 공중을 헤엄칩니다
심해의 잠수부 되어
바닥에 내려앉죠
오늘의 고독은 뭉개진 얼굴입니다
고여 있는 울음이 거센 물살을 품었죠
더 많이 얼룩진 쪽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여러 겹의 불면증이 도시의 편집점
절벽이 절벽의 출구가 될 때까지
파도는 부서지면서
회복을 꿈꿉니다
― 『가히』, 2023년, 창간호.
--------------------------
자신의 꿈이나 의지와 상관 없이 주체는 도시에 왔다. “칼날 같은 달을 품”은 시간이니 아마도 이 시의 배경은 초승달이나 그믐달이 뜰 무렵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공중을 헤엄”친다고 한 것은 비빌 언덕이 없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상황임을 말해준다. 이른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혼자서 헤쳐 나가려고 하니 너무 막막하고 답답하다. 주체는 “심해의 잠수부 되어” “바닥에 가라앉”는다. 잠수부는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갈수록 온몸을 옥죄는 수압水壓을 느끼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마주한다. 게다가 물속 깊은 곳으로 가면 더욱 어두워지고 고요해져서 진짜 세상과 격리된 듯한 고립감을 느낀다. 바다 깊숙이 들어가든, 고층 빌딩에 불시착하여 달을 품은 듯 공중을 헤매든 결국 주체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뭉개진 얼굴을 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 뭉개진 얼굴을 봐준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주체는 혼자다. 그래서 눈물이 고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눈물이 고여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혼자만의 고난이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물을 흘려보내 배출해야 하는데 그저 고여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나의 눈물을 봐주는 이가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고여 있는 눈물이” “거센 물살을 품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 내 눈물이 묻혀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공장소에서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가다 넘어져 다치거나 짐이 널브러진 상황을 가정해 보자. 내가 아니면 아무도 넘어진 사람을 돕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내가 돕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도울 거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이렇듯 도시 생활은 함께하고 있어도 삭막하고 고독하다. 두꺼운 페르소나Persona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각자의 일에만 정신이 팔려, 모두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결국 그 누구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이런 현실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지옥이다. 우리는 “더 많이 얼룩진 쪽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한다. 따지고 보면 도시에 살아가는 이들이 모두 얼룩이며, 서로의 얼룩을 더 잘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처지를 바탕으로 상대의 처지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여러 겹의 불면증이 도시의 편집점”이다. 아파트라는 다세대 주택은 한 공간 안에서 함께 밤을 맞이하고 함께 잠을 자는 곳이지만 그들은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다.
불면증이 겹쳐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 때문이다. 이 걱정과 불안이 발생하는 이유는 내게 주어진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혼자 갇혀 있는 것이 아닌데, 그 누구도 함께 힘을 모아서 절벽과 절벽 사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절벽은 장애물이 아니라 장애를 건너뛸 수 있게 하는 디딤돌 혹은 구름판 역할을 한다. 혼자 살겠다는 그 마음 자체가 결국은 나 혼자 죽는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대명사들』,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이승희 시인 _ 양의 집은 어디인가 < 포토포엠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 25 _ 공화순의 「감 농사」 (0) | 2024.11.18 |
---|---|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4 _ 공화순의 「와이파이 유목민」 (4) | 2024.10.22 |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24 _ 이토록의 「산수국 헛꽃이 푸르게 지듯」 (0) | 2024.09.21 |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4 _ 김영주의 「나는 몇 개의 얼굴로 사는 걸까」 (0) | 2024.09.15 |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3 _ 김수환의 「공터가 많아서」 (0) | 2024.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