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심언주 시인이 세번째 시집『처음인 양』(문학동네, 2022)을 펴냈다. 시인은 첫 시집 『4월아, 미안하다』(민음사, 2007)에서 세밀한 감수성과 언어 의식이 돋보이는 시세계를 보여주었고, 두번째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민음사, 2015)를 통해 “시적인 소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한다”(시인 김언)는 평을 받았다.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는 나비와 꽃, 식빵과 우유, 치과와 동호대교처럼 일상적인 배경과 사물들이 등장한다. 시인은그것들을단순히 일상적 풍경이나 하잖은 요소들로 관망하지 않고 오래도록 응시한다. 그 대상의 이름을 여러 번 곱씹는 과정을 통해일상 속에 깃든 불안이나 위험, 슬픔 같은 감정들을 형상화시킨다.그런데 시인은 어둠을 응시하면서도 우울로 빠져들지 않는 미학적 여과 장치를 갖는다. “입술이 굳어가고/ 턱이 굳어”가는 상황에서도 “큰 소리로 말”(「헌터」)하려 노력하고,“아맘니, 아맘니” 중얼거리며 “검게 칠해도 빈틈을 비집고”(「다음 도착지는 암암리입니다」) 뜨는 별빛을 찾아낸다.
특히시인은 언어유희를 통해 무겁지 않게상황을 풀어내는데,같은 단어를 반복해사용하거나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풍성한말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멸치는 사투를 벌이고/ 나는 화투를 친다”(「사투와 화투」), “하양에게선 히잉 히잉 말 울음소리가 들린다”(「마스크」), “오요 우유 모음을 모으며”(「과거도 현재도 주성분이 우유입니다」), “수북하던 수국이 졌다”(「수국 아파트」) 같은 시구들을 읽다 보면 우리는 눈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히입으로 중얼거리게 된다.
삶과 가까이 있는 사물에 대해 시적으로 곱씹은 후 화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불안이나 슬픔 같은 어두운 감정을 발견하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가그 감정의 주체인 화자 자신의 내적 상태까지 조망하는 일이다. 이번 시집에유독 ‘나는 ~이다’라는 표현이 자주등장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가장자리”(「수평선」), “나는 올리브를 지키는 사람”(「올리브, 유」), “나는 보츠와나 초원의 코끼리”(「헌터」), “나는 염치읍민입니다”(「염치읍민입니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시의 화자는 여러 상황과 관계 속에서 ‘나’의 모습을 다양하게정의 내리며‘나’라는 것이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상황과 관계 속에서 유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흐름에서 바라보았을 때,마지막에 놓인「묻지도 않고」에서반복되는 “나는 살아간다”는 말은 치열한 자기 인식을 통해 ‘나’의 여러 모습을 받아들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인 것이다.
<시집 속 대표시>
처음인 양
심언주
풀밭에서 양들은
뭉치면 한 마리, 흩어지면 백 마리.
몰려다니는 양들 따라 바뀌는 풀밭의 지도.
양은 처음 보아요, 호랑이는 보았는데 양은 처음 보아요.
나는 호랑이띠, 딸은 토끼띠, 벨기에로 향하는 기차 밖으로 소도 말도 양도 보이는데, 소나 말은 알겠는데, 양은 처음 본다고 딸이 말합니다. 양털 이불도 덮어주고, 양떼구름도 보여줬는데 딸은 토끼띠, 나는 호랑이띠, 양을 그려보긴 했는데, 양을 세어보긴 했는데……
엄마, 양은 처음 보아요.
처음이라 말하는 순간 처음은 사라집니다.
양이라 말하는 순간 양은 사라집니다.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양이 풀을 뜯습니다.
양양에도 대관령에도 딸을 데리고 갔는데, 양떼 목장에 가긴 갔는데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눈썰매만 탔습니다. 갈대를 뭉쳐놓은 듯 몰려다니는 양은 안 보여주고, 새하얀 양만 그리게 했습니다. 번제를 올리느라 화면에서 양이 피를 뿜을 때 딸의 눈을 가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은 안 보여주고 양 주변만 맴돌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