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박한 세상, 소외당한 이들을 위한 환한 위로
하종기 기자
이성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긴 꼬리 연애』(천년의 시작, 2022)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2000년 『세기문학』 시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집으로 『둘레길』 『나는 한 평 남짓의 지구 세입자』를 출간한 바 있다.
『긴 꼬리 연애』는 “오늘날 도시 사회에서 ‘사람’이 어떻게 왜소해지는지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시집이다. 해설을 쓴 이병철(시인, 문학평론가)은 “땅끝 해남서 나고 자라 국제 무역 도시 인천에 정착해 시를 쓰고 있는 이성률은 자기 생애 전체를 통해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및 도시 사회로의 강제적 순치를 겪어 냈다” 말하며 “이번 시집에서 그는 시종일관 삭막한 각자도생(各自圖生)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거기서 밀려 나온 아브젝트(abject)들인 사회적 약자들의 살려는 몸부림을 핍진하게 기록하는데, 이는 그 자신 삶의 캄캄한 소외의 그늘을 밝히는 거룩한 희생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또한 그가 “언어 주체로서의 자기 존재를 불태워 금속성 세계에 온기를 일으키려” 하며 “사람과 사람의 체온이 어우러져 사랑을 부화시키는 상생을 꿈”꾸는 “뜨거운 사랑의 시인”임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각박한 세상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위해 이성률 시인은 환한 위로를 건넨다. 사람들은 나무에게 “꽃이 피어야”, “잎 무성해져야” “예쁜 나무”라고 하지만, 이 시(「네가 얼마나 소중한지는」)의 화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너는 / 이미 울창한 숲이다”라고 말한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 기다리지 않아도 안다”고 가슴 뭉클한 격려를 한다.
우리는 사랑이나 자비에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착각한다. 여기에서의 ‘준비’란 여유라든가 성공이라든가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시인은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아름드리가 아니라도” 작은 “사랑의 품”이 이 세상을 “푸르게” 한다고 역설한다.
이병철 평론가는 이성률 시인에게 “사랑의 품”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웃을, 타인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이미 세상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완벽히 이해할 순 없을지라도 우리는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는 사람들이다. 이 시집을 읽는 우리는 이제 예수와 일 촌이 되었다. 뜨거운 사랑의 시인과 일 촌이 되었다.’고 말한다.
총 5부로 구성된 『긴 꼬리 연애』엔 시적 매력과 공감, 새로운 시선을 두루 접할 수 있는 64편의 시가 실려 있다. 여러 모로 움츠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긴 꼬리 연애』와 뜨거운 일 촌을 맺는 것은 어떨까.
한편 이성률 시인은 200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도 당선됐다. 인천문학상과 서해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계간 『학산문학』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시집 속의 대표시>
새 출발
이성률
그간 세 들어 산 나를
늦기 전에 내보내기로 했다
사흘 휴가 내 시작한 짐 정리
터줏대감처럼 굵직한 자리 지킨
굳은살 밴 편견과 지조 없는 개똥철학
줄창 지지한 정당과 짝퉁 일상 묶는다
찬장과 서랍과 침대와 장롱 밑
여기저기서 내미는 오래된 얼굴
나는 흠가고 해지고 먼지 앉은 자질구레였다
놔두면 쓸모 있을까 없을까 길어지는 고민
마음은 여는 것보다 닫기가 어렵다
홀가분하게 살고 싶은 적 많았던 한숨
구석구석 거미줄에 걸려 있다
자주 길을 잃은 곳 집이었다
끝도 없이 물어 온 집착
으르렁 지킨 나는 넥타이를 맨 개
2.5톤 이삿짐 차 조수석에서
낯익은 남자가 손 흔들며 간다
새로 들일 세입자 이번엔 여자다
― 『긴 꼬리 연애』, 천년의시작, 2022
내일을 뒤적이다
이성률
사는 게 뭐 그렇지 싶을 때
버스를 타고 새천년장례식장에 갑니다.
가장 쓸쓸한 빈소를 찾아
살아온 날을 조문합니다.
처음 보는 영정 속의 그녀
마흔은 되어 보이게 웃습니다.
서로를 알아보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저 웃음 덕에 환했을 단칸방
국화꽃 한 송이 건네고 듣는
그녀의 이야기 낯이 익습니다.
살아온 이야기 꼭
장막극이어야 할 까닭 없습니다.
살아 있는 일흔보다 넉넉한 얼굴로
요단강 건너고 싶은 그녀
그녀 따라 수의 입혀 보낼 것 없는지
내일을 끔벅끔벅 뒤적입니다.
파리한 치마저고리에 까맣게 슬픔을 걸친
아홉 살의 누리
누리에게 오래도록 외삼촌으로 있다 왔습니다.
살아서 죽어 사는 날 많은
우린 유서 깊은 유가족입니다.
― 『긴 꼬리 연애』, 천년의시작,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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