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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시in〉 스페셜 집중 조명_ 이건청 시인편2 _ 자선 대표시

스페셜 집중조명

by 미디어시인 2025. 4. 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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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대표시>1 _ 시집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에서 고른 시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

 

이건청

 

너를 잊었네,

까아맣게, 깜깜하게 잊었네

너 없는 세상에서

나는 키가 크고,

기러기 떼 지어

기역 자도 니은 자도

쓰며 가는

천의 날이, 만의 날이

갔네,

 

잃어버린 신발들

물 따라 떠 내려 간 날들이

쓰러지거나 엎어지거나

덧쌓여서

80년 내 퇴적암으로 굳어

옛 모습대로 잠들어 있으리

 

무서리 내린 늦가을

새들은 아직도 노을 속에서

들끓고 있는데

나는 내 비이글호* 돛을 올려라

유년의 일기 차곡차곡 쌓인 곳,

화석되어 굳은 내 유년 퇴적암에

다시 귀를 대고 엎드려 듣느니,

 

들리네, 까마득 먼 곳으로 가서

섬이 된, 암초가 된 푸른 멍들,

갈라파고스* 육지 거북도

큰뿔코뿔새도 그냥 거기서 크고 있다고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이

해무海霧에 실어 전해 주네,

갈라파고스

내 잊혀진 날들의 갈라파고스.

 

*비이글호: 찰스 다윈이, 승선 5년여 지질해양학 탐색에 나섰던 배의 이름.

*갈라파고스: 남아메리카대륙 에콰도르에서 서쪽 바다로 1,000km쯤 떨어져 있는 여러 섬들과 암초지대. 19개 섬으로 표기함. 인간을 포함한 외래종 동식물의 발길이 닿지 않아 대륙에서는 이미 멸종된 희귀, 고유 동물등 잔존생물들이 살고 있음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 달나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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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건청

 

포경업자들이

새끼 고래를 데불고 있는

혹등고래나 향유고래를 만나면

먼저 새끼 고래부터 죽인다는데,

새끼 고래가 작살을 맞으면

어미 고래는

죽어가는 새끼 고래를 두고 떠나지를 못하고

새끼고래 곁을 맴돌다가

 

큰 작살포를 맞는다고 한다.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 달나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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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저녁의 시

 

이건청

 

폐선 하나 있었네

새들은 다 떠났고

눈보라도 그친 날,

세상의 마지막

절간이 혼자 남아

 

쇠북을 울리는 저녁.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 달나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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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사람에게

 

이건청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감싼

먼지와 얼음 폭풍을 뚫고,

외계 우주의 태풍도 헤치고

막막 우주 공간을 달려가고 있다고 한다

 

지구인이 만든

722kg의 쇳덩이 보이저 1호는

초속 15km의 속도로 우주 공간을 헤쳐가면서

지구인 누구도 못 본 우주 풍경을

지구로 송신해 주고 있다고 한다

48년 전 지구 구식 컴퓨터를 싣고 떠난

탐사선은 저 혼자 기신기신

첫 대면의 우주 풍광을 찍어

지구로 송신해 주고 있다한다

 

사람아, 옛 사람아

피도 살도 없는 맨몸으로

250km 밖을 간

사람아,

무량수 우주 속으로 멀어져가고 있는

캄캄한

사람아.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 달나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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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이건청

 

1977년 발사된

우주탐사선 보이저호에는

불시에 만날지도 모를 외계인을 위한

외계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렸다.

 

금도금 30cm 크기의 디스켙엔

115개의 지구 이미지 그림과

파도, 바람, 번개, , 고래와

동물들이 내는 소리,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의 음악,

그리고, 지구 55개 국어의 인사말들이 담겼다.

 

외계행성의 그대들아,

지구인들이 내민

이 손을 잡아다오

망극한 이 손을 잡아다오

80억 인류가 건네는

지구 이미지들을, 암호를,

구명 신호를,

그대들이 피와 살과 뼈 아닌 생명이어도

와서 열어다오,

들어다오

감싸다오

그대들, 오순도순 우주 가족 마을

문을 열어다오

잡아다오.

80억 지구인들이 내민

망극한 이 손

 

*Voyager: 미국 NASA1977년에 발사한 우주탐사선 1호와 2. 어디선가 만날수도 있을 외계인들에 보내는 디스켓 편지를 싣고 있음. 탐사선은 현재 태양계를 벗어나 외우주 240km를 가며 지구로 전파 신호를 보내오고 있음.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 달나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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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대표시>2 _ 이전 시집에서 발췌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

 

이건청

 

오른쪽 다리를

왼 다리 위에 포개니

제각기 다른 쪽을 딛고 살던 두 다리가

하나의 몸이었음을,

세상 단풍 속을 흘러내리는 천 개 강들도

같은 물임을 알겠다.

이제야, 이제야

그걸 알겠다.

백발의 날

두물머리 강가에 와서 보니,

산들이 계곡을 만들고

산굽이를 만들어

다른 쪽의 강들을 불러 앉히며

다독이고 타일러

그냥 물새 우는 새벽 강을 만드는 것도

연꽃 밭으로 물닭들을 불러

젖은 풀들을 쌓게 하며

그 위에 몇 개 알을 낳게 하는 것도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하는 일인걸

알겠다, 알겠다.

서서히 상반신을 기울여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느니

 

물이며, 산이며, 단풍들이 보인다.

그것들이 한몸인 게

환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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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밭에서

 

이건청

 

진흙 밭에 빠진 날, 힘들고 지친 날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그만 자리에 눕고 싶은 날

연꽃 보러 가자,

연꽃 밭의 연꽃들이

진흙 속에서 밀어 올린

꽃 보러 가자

흐린 세상에 퍼지는

연꽃 향기 만나러 가자

연꽃 밭으로 가자,

 

연꽃 보러 가자

어두운 세상 밝혀 올리는

연꽃 되러 가자

연잎 위를 구르는 이슬 만나러 가자

세상 진심만 쌓고 쌓아

이슬 되러 가자

이슬 되러 가자

눈도 흐리고, 귀도 막혀서

 

자리에 눕고만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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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집

 

이건청

 

굴피집에 가고 싶네

굴피 껍질 덮고

지붕 낮은 집에 살고 싶네

 

저녁 굴뚝 되고 싶네

저문 연기되어 흐르고 싶네

 

허릴 굽혀 방문 열고

담벼락 한켠

아주까리 등잔불 가물거리는

아랫목에 눕고 싶네

 

뒷산 두견이

삼경을 흠씬

적시다 가고 난 후

문풍지 혼자 우는

굴피집에

눕고 싶네

나 굴피집에

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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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이건청

 

진달래꽃이 만발해서

산비탈들이 붉게 물들어 있다.

거기, 세상의 매와 멍을 다

품어 안고 퍼질러 앉아

꽃들이 흐느끼고 있다.

아니, 아니,

멍든 사람들을 다독여

불러 앉히며

너는 울지 마라,

눈보라 휘몰아치던 때도 가고,

새들도 오지 않았느냐,

봄비 푸지게 내리고,

이제, 얼었던 산비탈도 다 녹았으니

세상아, 너는 울지 마라,

겨우내 덮고 잔 이불도

햇볕에 내어 펼쳐 말리렴,

보아라, 저 아지랑이 산들이

매와 멍을 다 품어 안고

흐느끼고 있지 않느냐?

 

이 봄, 아지랑이 쪽

산비탈들이 즈믄 세상의

매와 멍을 다 품어 안고

핏빛 울음을

대신 울어주고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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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이건청

 

곡마단이 왔을 때

말은

뒷마당 말뚝에

고삐가 묶여 있었다.

곡마단 사람들이 밥 먹으러 갈 때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쫒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

 

날이 저물고,

외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말은 그냥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곡마단 곡예사가 와서 고삐를 풀면

곡예사에 끌려 무대에 올라갔는데

말 잔등에 거꾸로 선 곡예사를 태우고

좁은 무대를 도는 것이

말의 일이었다.

높고 좁은 등허리 위에서 뛰어오르거나

무대로 뛰어내렸다가 휘익 몸을 날려

말 잔등에 올라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곡예사는 채찍으로 말을 내리쳐

박수소리에 화답해 보였다.

곡예사가 떠나고 다른 곡예사가 와도

채찍을 들어 말을 내리쳤다.

말은 매를 맞으며

곡마단을 따라다녔다.

곡마단 사람들이 더러 떠나고

새사람이 와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쫓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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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청

 

멍은 검다.

아니 푸르다.

아픈 멍도 있지만

그리운 멍도 있다.

 

쌓인 그리움이

옹이로 짜여,

가슴 한켠에

대못으로 박힌 멍도 있다.

 

명정에 덮인

목관 속까지 따라가

백골에 새겨지는

멍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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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강

 

이건청

 

앞 개울 물 소리

나는 듣지 못하지,

뒷산 넘겨봐도

보지 못하지,

 

귀도 눈도 흐린 내가

물새 소리도,

떨어지는 동백꽃도

놓친 채 이렇게 살다가

두물머리 넓은 물에 그냥 섞인다면,

마현마을 포구에서

자맥질하는 물닭들도

그냥 스쳐 가야 하리,

 

큰 강 거센 흐름에 섞여든 채

핏빛 노을

떠메고 바다로 가는

벙어리 강 되리,

장님 강 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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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이건청

 

아직 남이었던 아내와

서울행

막차를 기다리고 있던,

 

저물녘, 미루나무 조금씩 지워지던,

날 저문

장호원 어디쯤이던가,

막차를 기다리고 있던,

서먹 서먹 기다리고 있던

비포장 신작로 위

어둔 하늘로

 

클라리넷을 불며 가던,

오보에나 피콜로를 불며

떼 지어 가던

늦가을 기러기 떼 있었는데,

눈도 귀도 흐려진 날,

기러기 없는

늦가을 빈 하늘,

아직까지

저무는 길가에 서서

 

언젠가 올

막차를 기다리고

서 있는

늙어버린 남자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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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속의 시*

 

이건청

 

시인 이작 카체넬존은 가스실에서 죽었다.

194310월부터 1944년 정월까지,

그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을 시로 적었다.

운율까지 갖춘 서정시였다.

사람이 부서져 비누조각이 되는 날,

머리털이 벗겨져 양말이 되는 날,

날 흐리고 비 오는 세상,

몇 마리 멧새 오고,

또 가기도 했을 것인데,

시인 이작 카체넬존이 죽은 후,

아우슈비츠에 남은 사람들이,

죽은 시인이 쓴 시를

여섯 개의 유리병에 넣었고, 밀봉해서

마당의 전나무 아래

땅을 파고 묻었다.

그리고, 그리고, 시인이 죽고 없는 세상,

하루 종일 장맛비 내리는

창밖을 향해 앉아

죽은 시인이 남기고 떠난

시를 펼치니,

젖은 새 한 마리 날아와

낡은 책장 위에 날개를 접는다.

전나무 밑에 묻힌 유리병 마개를 열고

60여 년을 파득여 내게 온 새,

시인 이작 카체넬존

 

*유리병 속의 편지뿌리 뽑힌 유대인의 큰 노래(전영애 역. 한마당. 1999)로 간행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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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아, 말 사러 가자

 

이건청

 

오늘 나는 한 10마리 쯤

종마를 사야겠다.

콧김이 쎈 놈으로,

우람한 남근을 단 놈으로,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하고

종마를 사리라.

새끼를 풍덩풍덩 낳을 암말도

100마리쯤,

다리 근육이 탄탄한,

엉덩이가 펑퍼짐한 암말을 사리라.

고삐도 안장도 내리고,

들판에 풀어놓으리라.

말들이 말들끼리 하루 종일

들판을 헤매다 오리라,

몇 마리는 삼경도 지나

겨우 오리라,

은하수 질펀한 들판을 걸어

암말과 숫말이 짝을 지어 오리라,

말 속에 씨를 심은 암말이

어여삐 오리라,

숫말 옆에서 암말이

새끼도 낳으리라.

아지랑이 속에 낳으리라.

첫 세상의 어린 말들이

땅 끝까지 달려가

바다 앞에 서서

수평선 끝의 그리움을 만나

큰 소리로 울리라. 앞발을 치켜올리며

큰 소리로 울리라,

시인들아, 당신들의 풀밭이

망아지들로 가득차고

말들이 말 속에 푸진 씨를 자꾸 심으면,

푸른 초원에 무진장 말들이 태어나겠지,

은하수 아래, 말들이

망아지를 데리고 돌아와

문밖에서 당신들을 부르리라. 시인들아,

시인들아,

당신들이 놓아 키우는 말들이

큰 소리로 울리라.

말들이 말들 속에 씨를 심고,

푸진 말들이 자꾸 태어나리라.

시인들아, 당신들의 말들이

말들을 자꾸 품으면

망아지들이 아슴아슴 태어나리라.

시인들아, 똘방똘방 말들이

태어나리라.

 

오늘 나는

아주 큰 남근을 단 종마를

100마리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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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시in〉 스페셜 집중 조명_ 이건청 시인편2 _ 자선 대표시 - 미디어 시in

1 _ 시집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에서 고른 시 열아홉 개 섬과 암초들을 부르는 시 이건청 너를 잊었네,까아맣게, 깜깜하게 잊었네너 없는 세상에서나는 키가 크고,기러기 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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