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0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2010년 계간 ≪시에≫에 평론으로 등단한 김효은 작가가 세 번째 비평집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밥북, 2025)를 발간했다.
김효은은 시와 평론 양 분야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젊은 작가다. 그래서인지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에선 문학에 대한 섬세하고도 따뜻한 시선과 깊이 있는 통찰이 감지된다. 시를 쓰면서 비평의 감성과 지평을 동시에 넓혀온 탓일 게다.
김효은은 비평집 전체에 걸쳐 문학이 지닌 희망, 빛,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긍정적으로 전망하려 애쓴다. 그뿐만 아니라, 문학과 정동, 문학과 경제, 문학과 자연 등 다채로운 주제의 비평들을 정교하게 엮어내며, 시대를 관통하는 문학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치열하게 탐색하고, 숨겨진 징후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낸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다시, 문학에 관해 묻다」에서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의 답을 심층적으로 탐색한다. 감정, 경제, 자연이라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학의 본질에 대해 탐문하는 형식의 깊이 있는 주제 비평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2부에는 2023년 봄에 야심 차게 창간된 계간 《시와징후》에 1년 동안 특집으로 꾸준히 연재해 왔던 ‘현대시와 징후’에 관한 독창적인 특집 원고들이 한 장을 이룬다. 특히 「폐허에서 징후를 찾다」에서는 병, 경고, 얼룩 등과 같은 낯설고 강렬한 이미지들을 통해, 시가 은밀하게 읽어내는 혹은 시 속에 깊숙이 잠입해 있는 미묘한 징후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암울한 폐허와 절망 속에서도 언어가 끈질기게 만들어내는 한 줄기 희망과 빛의 소중한 가능성을 신중하게 타진하기 위한 비평적 전위를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3부에서는 장석주, 허연, 전영관 등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독창적인 시 세계에 대해 깊이 있고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4부에서는 정숙자, 이송우, 황정산 등 주목받는 시인들의 개성 넘치는 작품을 통해 굳건한 견딤과 다채로운 겪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행복과 연대의 가치를 재확인하며, 잊혀져 가는 존재들의 소중한 무게를 시적으로 기억하는 특별한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논한다.
김효은은 이번 비평집에서 문학이 단순히 현실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어둡고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창조하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강조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는 문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문을 활짝 열어줄 깊이 있고 가치 있는 비평서가 될 것이다.
<책 속 구절 맛보기>
“폐허는 그러나 물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폐허는 사람의 마음과 의식 안에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도 그 자장들 속에도, 안팍으로 존재한다. -(중략)-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폐허를 마주한다. 폐허(廢墟), 한자 그대로 무너지고 부서진 황량한 기슭이나 터를 마주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始作)은 시작(詩作)된다. 특히 시인은 그 폐허의 잔해 위에 언어의 돌탑을 다시 쌓아 올리는 자들이다. 시지프스의 돌처럼, 심지어 신의 진노 끝에 무너져 내린 바벨탑 아래 각기 다른 언어로 흩어진 상황에서라도 그들은 포기를 모르고 폐허 위에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른다. 극한의 상황에서 혹은 텅 빈 폐허 속에서 그들에게 다가올 “마주 잡을 손 하나”(고정희)는 아마도 시(詩)의 손목, 시(詩)의 동아줄이 아닐까. 자 이제 “뿌리 깊은 벌판”, “캄캄한 밤”의 폐허 속에서 절망을 ‘문단속’할 희망의 징후들, 절망을 잠그면서 동시에 희망을 열어낼 징후의 이중 ‘열쇠’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밥북, 2025) 9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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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질끈 감았던 순간에도, 왼쪽 손목을 응시하던 주저의 순간에도 시선의 방향을, 칼끝의 방향을 돌려주던 문장의 힘을 기억한다. 한 권의 책 그리고 한 줄의 시가 있어 출구 없는 미로 속에서, 높이를 알 수 없는 깊은 우물 안에서도 희미한 빛에 기대어 기어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그런 아득한 밤들이 있었다. 어디에서라도 어느 상황에서라도 한 줄 문장으로 버틸 수 있는 삶이란 몹시도 애처롭지만,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질식할 것만 같은 순간에, 숨비소리로 터져 나오는 언어의 불꽃들은 또한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가. 그 인화성의 징후들을 점자로 더듬으며 헤쳐 왔던 그 모든 과거의 순간들을 짚어 본다. 쳐낼 수 없는 꼬리처럼, 엉겨붙은 넝마처럼 너저분하게 주렁주렁 매달린 긴 절망의 터널들에도 언젠가 점화의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공중으로 높이 쏘아 올린 화농의 화약들을 터뜨리며 덜 아픈 방식으로, 독자들과 형형한 공공의 불꽃놀이를 밤새 즐길 수도 있으리라.”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밥북, 2025) 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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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례사 비평이나 재단 비평이 아니라 오롯이 내 글, 내 시론과 내 철학을 담아서 예리하고도 풍부하게 그러면서도 개성 있는 글을 쓰고 싶다. AI가 쓴 것과 다를 바 없는 참고서 문장 같은 틀에 박힌 기계식 비평문을 가장 견제한다. 외국 이론 범벅이거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만연체의 비평문도 솔직히 매력은 없다. 비평은 문학의 하위 장르가 아니다. 철학의 시녀도 아니고 장식품, 부속품도 아니다. 학술 논문이나 논평과도 다르다. 비평은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이고, 미학적 장르이다.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나만의 지문이 담긴, 고유한 비평을 쓰고 싶다. (중략) 비평이라는 장르 자체를, 그 투명한 정직함과 다채로움의 양식을 신뢰한다. 문채와 문체, 사유와 논리, 차가움과 뜨거움, 정동과 철학이 한 몸을 이루는 이토록 지적인 장르를 어느덧 사랑하며 살고 있다. 시는 시대로, 비평은 비평대로 내 삶의 주춧돌을 이루고 있다.”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밥북, 2025) 서문 중에서
섬세하고도 따뜻한 시선과 깊이 있는 통찰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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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기자 200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2010년 계간 ≪시에≫에 평론으로 등단한 김효은 작가가 세 번째 비평집 『징후의 시학, 빛을 열다』(밥북, 2025)를 발간했다. 김효은은 시와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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