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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사유와 함께 한층 더 굵어지고 깊어진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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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5. 4. 17.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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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시집 나무의 발성법시인동네시인선으로 출간

 

 

 

하린 기자

 

1991동서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시집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너무 많은 당신』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아내의 문신』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내 안의 흔들림을 발간 하고, 김춘수시문학상, 한유성문학상, 경희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박완호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나무의 발성법을 시인동네시인선으로 출간했다.

 

이전 시집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에서 박완호 시인은 아프고 진지한 눈으로 세상을 탐색하며, 시 세계의 깊이를 구축했다. 우월한 태도를 버리고 섬세한 눈으로 끝없이 탐색하는 자세로 시적 대상을 발견하고, 대상 안에 담긴 본질성과 근원성을 끌어안은 후 새로운 차원을 전개하거나 현재 자신이 마주한 상황에 대한깊은 사유로 확장했다.

 

박완호 시인은 신간 시집 나무의 발성법에서 섬세한 눈을 가진 견자의 시선을 유지한 채 날카롭게 벼린 감각(관찰 감각, 사유 감각)을 선보인다. 굴곡진 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반응해 온 안티 감각을 자연 표상, 정신 표상, 현실 표상 등을 통해 형상화하는데, 시대 인식에 대한 균형적인 사유를 동반한다. 시대가 위독한데도 입을 닫은 채 일신의 아픔에 몰두하는 방관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던 시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묻어난다. 그 언어는 한 알의 씨앗에서 발아한 후 온갖 부조리와 갈등에 직면하고, 혹독한 삶을 감내하면서도 어엿한 한 그루의 나무로 서려는 의지를 표방한다.

 

나무의 발성법을 읽는 일은 섬세한 사유와 함께 한층 더 굵어지고 깊어진 목소리를 펼치고 있는 박완호 시인의 시 세계를 가까이에서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미리 시 세계의 일부를 확인하기 위해 <미디어 시in>에서는 미니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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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집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시집 표제 나무의 발성법이 눈에 뜨입니다. 특별한 의미나 의도가 있나요?

 

A: 표제시는 예전에 나무의 발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시인데, 이번에 시집을 묶으며 제목을 나무의 발성법으로 수정했습니다. 씨앗에서 출발하여 마지막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의 생을 통해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한편, ‘라는 존재가 마주하고자 하는 삶의 자리를 소박하게나마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라는 한마디가 함축하는 의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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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집이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구성이 갖는 특징은 없나요?

 

A: 시집을 낼 때, 예전에는 주제를 중심으로 작품을 배치하기도 했는데요. 최근에는 네 개의 소시집을 한 권의 시집에 담는다는 생각으로 시집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시의 분량에 따라 각 부에 들어 있는 작품의 구체적인 순서가 바뀌기도 하지만요. 이번 시집의 경우, ‘맨 끄트머리라는 시를 마지막 페이지에 배치하여 구성의 맛을 더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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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공을 들인 시는 어떤 시이고, 애착을 갖는 시는 어떤 시인가요?

A: 시를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과 시인의 의도는 늘 비껴가게 마련이지요. 이번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달동네 집 찾기달동네 쪽방살이는 두 분 나이를 합해도 백 살이 안 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담은 것인데, 2부의 마지막 페이지에 수록된 훗날의 꿈이라는 시와 함께 개인적으로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표제작인 나무의 발성법과 더불어 저로서는 나름대로 상당 시간 공을 들여 쓴 시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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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홉 번째 시집을 발간하셨는데요. 자신만의 시 창작 방법이나 창작할 때 갖게 되는 특별한 루틴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A: 어쩌다 보니 시집을 아홉 권씩이나 묶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는 시집 한 권 내는 게 꿈이었는데 말이에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모든 순간을 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중입니다. 순간순간 마주치는 사물들, 사건들과의 관계가 빚어내는 시의 찰나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무언가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하고 머릿속으로 새기고 매일매일 시를 써 가는 중이기도 하고요. 올해로 34년째 교직 생활을 이어오는데, 처음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매일 아침 6시 반 정도면 출근해서 읽고 쓰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오고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강박감을 앓고 있기 때문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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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생활인 박완호와 시를 쓰는 박완호는 다른가요? 아니면 유사한가요?

A: 겉으로 보기에 시인 박완호와 생활인 박완호는 조금의 차이도 없어 보일 것 같아요. 생활인 박완호는 가장으로서나 직장인으로서나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중이니까요. 시인 박완호는 마음속으로 늘 자신과의, 세상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요. 시와 삶이 별개가 아닌 시인, 그것이 제가 추구하는 시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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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가까운 시기와 조금 더 먼 시기로 나누어서 설명해 주세요. 그리고 시집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A: 올해를 마지막으로 오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십여 년 정도는 읽고 쓰는 일만 하는 삶을 살아볼 작정입니다. 걷기 여행을 즐기면서 미뤄둔 산문을 쓸 계획도 세우고 있고요. 또 언제 나올지 모를 열 번째 시집을 위해 열심히 시를 써 가야겠네요.

늘 경계를 서성이기만 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담긴 부끄러운 시집이지만, 제 시를 읽으시는 분들이 저의 어눌하면서도 진실한 목소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우리의 삶과 세계를 돌아보는 자리에 머물러 주시기를 소박하게 빌어봅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나무의 발성법

 

박완호

 

씨앗이라고, 조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뿌리 쪽으로 가는 숨통을 가만히 연다.

새순이라고 줄기라고 천천히

좁은 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는다.

길어지는 팔다리를 쭉쭉 내뻗으며

돋아나는 가지들을 허공 쪽으로

흔들어 본다. 흐릿해지는 하늘 빈자리

연두에서 초록으로 난 길을 트이며

이파리가 돋고 꽃송이들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을 위해

아직은 나비와 새들을 불러들이지 않기로 한다.

다람쥐가 어깨를 밟고 가는 것도

몰래 뱃속에 숨겨둔 도토리 개수가

몇 개인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한다.

하늘의 빈틈이 다 메워질 때쯤

무성한 가지들을 잘라내고 더는

빈 곳을 채워 나갈 의미를 찾지 못할 만큼

한 생애가 무르익었을 무렵

가지를 줄기를 밑동까지를 하나씩 비워가며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르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몇 권의 책 빈 술병을 올려둘 자리를 준비한다.

그리고는 어느 한순간 잿더미로 남는

황홀한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는 아무것도 발음할 필요가 없는

바로 그 찰나, 나무는 비로소

한 그루 온전한 나무가 되는 것.

 

-라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천천히 발음해 본다.

―『나무의 발성법, 시인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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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골

 

박완호

 

언제부터인지 나에게서 반골이 보이지 않는다 툭하면 욱, 터지기 직전에 머물고 마는 중년만 덩그러니 남고 더 멀고 깊은 곳을 바라보던 나의 반골이 떠나가고 말았다 반골이 비어가는 시인을 떠난 시가 서둘러 시야를 벗어나려 한다 달아나는 말을 붙잡으려면 주저앉은 반골의 척추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야 한다 공연히 두근대는 첫발을 어디로든 내딛어야만 한다 저 너머로 치달으려는 마음을 무어로도 억누르지 않아야 한다 눈앞에 떠오르는 신기루의 벽을 무너뜨리며,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라도 끝까지 걸어가야만 한다

―『나무의 발성법, 시인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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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 집 찾기

 

박완호

 

그녀의 거처는 달동네 어디쯤이다.

 

달의 주소록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

희미한 반점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어둠의 줄기를 따라 늘어선

밤의 뒷골목 어딘가에 그녀가 머물고 있다.

 

선산 중턱에 걸린 반달 빈자리,

아카시아 뿌리를 움켜쥐고는

한사코 거기 머물고 싶어 하던

그녀는 언제부터 저곳에 집을 짓고 있었을까?

 

툭하면 번지수를 놓치는 무허가 판자촌 같은

달의 모서리 어딘가에 있을 집을 찾아 나선다.

 

어둠 속을 서성이는 어린 별을 만나면

아직 그녀의 집을 찾고 있느냐고

너무 슬프지 않은 얼굴로 물어다오.

 

달동네의 옆구리가 시큰거릴 때마다

번지수 없는 집이 조금씩 기울어간다.

 

더는 그녀의 주소지를 물을 데가 없다.

―『나무의 발성법, 시인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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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기자 1991년 《동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시집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너무 많은 당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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