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은 기자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문태준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풀의 탄생』을 문학동네 시인선 232번째 책으로 출간했다. 시인은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아침은 생각한다』 등 다수의 시집과 『느림보 마음』,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등 산문집을 펴냈으며, 노작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박인환상, 무산문화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시집 『풀의 탄생』은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서 풀밭을 일구며 살아온 다섯 해의 시간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교감 속에서 탄생한 시편들을 수록하고 있다. 시인은 풀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작위 없는 시를 지향하며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는 시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풀을 보며 그 존재와 함께 숨 쉬는 일상을 통해, 시인은 시 역시 매달리지 않으면서 조용히 머무는 것이어야 한다는 창작관을 보여준다.
문태준 시인은 자연 속에서의 삶이 자신의 시적 감각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한다. 생명의 순환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하나를 흔들면 같이 흔들린다”는 생명 들의 연대성과 상호작용을 실감하게 되었고, 이를 시적 표현에 자연스럽게 반영하였다. 또한 자연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동근(同根)임을 체감하며, 시가 일상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감응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풀의 탄생』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흙과 꽃, 식물을 통해 생명성을 조망하며, 2부는 여름의 감각과 풍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3부는 물결, 해무, 고향 등의 이미지를 통해 이동과 정체성을 탐색하고, 4부는 소멸, 재생, 고요함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존재의 본질을 시적으로 다룬다.
총 63편의 시가 수록된 이번 시집은 자연의 순환과 존재의 본질을 사유하는 작품들로, 시인은 자연을 감상의 대상이 아닌 협업의 주체로 간주하며, 일상적 풍경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다. 계절감과 감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절제된 양상을 보인 「작약꽃 피면」, 「잎사귀에 여름비가 올 때」, 「멀구슬나무 아래에」 등이 그 예에 해당한다.
문학평론가 홍용희는 해설에서 “문태준의 고유한 창작 방법론은 자연과의 협업”이라며, “그의 시는 감각을 일깨우고 고요 속에서 본질과 마주하도록 이끈다”고 평했다. 특히 시집에 등장하는 ‘귤꽃’은 제주 자연에 감화된 시인의 정서를 상징하는 주요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
문태준 시인의 시집 『풀의 탄생』은 생명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서정의 절정으로, 한국 현대 서정시의 지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평가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잎사귀에 여름비가 올 때
문태준
잎사귀에 빗방울이 떨어지네
나의 여름이 떨어지네
빗방울의 심장이 뛰네
바라춤을 추네
산록(山綠)이 비치네
빗방울 속엔
천둥이 굵은 저음으로 우네
몰랑한 너와 내가 있네
잎사귀는 푸른 지면(紙面)
너에게 여름 편지를 쓰네
―『풀의 탄생』, 문학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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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문태준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빛
이별의 낙수(落水) 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띔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풀의 탄생』, 문학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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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간힘을 쓰지 않고
문태준
눈송이가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네
안간힘을 쓰지 않고
숨이 참 고르네
손쓸 필요가 없지
여파(餘波)도 없지
누구도 무너지지 않아
저 아래,
벙싯벙싯 웃고 있는 겨울 허공 좀 봐
―『풀의 탄생』, 문학동네, 2025
풀과 산다, 풀밭에서 탄생한 서정의 절정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풀과 산다, 풀밭에서 탄생한 서정의 절정 - 미디어 시in
이정은 기자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문태준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풀의 탄생』을 문학동네 시인선 232번째 책으로 출간했다. 시인은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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