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의 역류
한희정
마냥 받아주던 배수구가 막혔어
당연한 줄 알았어 내리사랑처럼 말이야
한 번도 거부한 적 없어 한계인 줄 몰랐어
흐르다 멈추는 곳엔 이유가 꼭 있었어
녹이 슨 기관지에 소통 못한 말들이
한 모금 되려 내뱉는 속울음이 힘겨워
― 『립스틱 지우는 저녁』, 목언예원,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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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생동하는 것들은 흐름 속에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다르지 않아서, 한쪽으로만 쏟아지는 마음이나 일방적인 수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고여 썩어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헌신을 당연한 중력처럼 여기며 그 안온함에 안주하곤 하지만, 소통이 거세된 채 일방통행만 계속되는 관계는 언젠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다. 당연하게 여겼던 타인의 침묵이 실은 서서히 차오르는 슬픔의 수위였음을 깨닫지 못할 때, 관계의 균열은 이미 시작된다.
한희정 시인의 시 「관계의 역류」는 바로 이 지점, ‘마냥 받아주던 배수구’가 막혀버린 임계의 순간을 포착한다. 시 속의 배수구는 내리사랑처럼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내던 타자의 인내와 수용을 상징하지만, 시인은 그 인내에도 분명 ‘한계’라는 끝이 존재함을 서늘하게 일깨운다. “흐르다 멈추는 곳엔 이유가 꼭 있었다”는 통찰은, 우리가 타인의 침묵을 허락으로 오해하며, 얼마나 많은 이기적인 감정들을 쏟아부었는지를 아프게 반성하게 한다. 녹이 슬어버린 기관지에 걸려 소통되지 못한 말들이 결국 견디다 못해 뱉어내는 ‘속울음’이 되어 역류할 때, 관계는 비로소 그동안 외면해 온 위태로운 민낯을 드러낸다.
결국 관계 소통의 건강함은 사해(死海)가 되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비움과 순환에 있다. 받기만 하고 내어줄 줄 모르는 바다는 생명이 살 수 없는 고립된 죽음의 공간이 되고 만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사랑이란 타인의 존재를 위해 내 안의 공간을 비워두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누군가에게 받은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며 움켜쥐고만 있을 때, 그 관계는 생명력을 잃고 화석화된다. 자신에게만 향해 있던 시선을 다시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붙들고 있던 손을 놓아줄 때 비로소 멈추었던 소통의 물길도 다시 트이기 시작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숨구멍을 막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것, 그것이 역류하는 관계를 다시 흐르게 할 유일한 열쇠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대명사들』,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 고산문학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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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8 _ 한희정의 「관계의 역류」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8 _ 한희정의 「관계의 역류」 - 미디어 시in
관계의 역류 한희정 마냥 받아주던 배수구가 막혔어 당연한 줄 알았어 내리사랑처럼 말이야 한 번도 거부한 적 없어 한계인 줄 몰랐어 흐르다 멈추는 곳엔 이유가 꼭 있었어 녹이 슨 기관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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