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린 기자
2009년 계간 『시인시각』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주영헌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달아실, 2026)를 발간하며 6년 만에 독자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에서 현대 문명이 직면한 비인간성과 소외, 그리고 존재론적 고독을 ‘멸종’이라는 파격적인 키워드로 풀어낸다. 특유의 예리한 시적 감각으로 사회적 ‘디스토피아’를 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주영헌은 ‘멸종’을 생물학적 종말이 아닌 ‘사랑의 부재’로 인한 현상으로 규정한다. 가령, 「멸종」에서 “마지막 사랑의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죽음”을 인류 멸종의 신호탄으로 본 것은 현대 사회의 심각한 소외 현상을 상징한다. 특히 「허가된 절명, 동부동 홀로코스트」에서는 개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연 파괴를 목격하며, 죄책감마저 사치로 치부하는 현대인의 윤리적 마비 상태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표제작 격인 「안정적인 패배감」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고객님”이라 불리며 자아를 상실해가는 현대인의 무력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또한 자신을 ‘플래니모(떠돌이 행성)’로 비유하며 “당신의 인력권에 다가설 수 없었다”고 토로한 대목을 통해, 관계의 실패를 안간힘을 다해 견뎌내고 있는 시적 화자의 아린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해설을 쓴 김윤삼 시인은 이번 시집이 “멸종의 징후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의 복원을 꿈꾸는 역설의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감각적인 통찰에 의한 진단과 비판, 동시에 구원의 서사가 시집 전반에 걸쳐 깔려있는 것이다.
이 시집은 고통의 육즙을 짜내 쓴 상한 문장들의 집합이다. 하지만 그 고통은 “무(無)에서 솟아나 생명에서의 구원”으로 향하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삶의 중력에서 탈선하지 않으려 애쓰는 당신(독자)에게 “모든 울음 꼭꼭 채울 수 있는 집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따뜻한 기원은, 멸종의 위기 앞에서 우리(독자)가 마지막으로 붙잡아야 할 것이 결국 곁에 있는 사람이고 차 한 잔을 함께 나누는 마음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는 ‘디스토피아’를 진단하고 예감한 동시에 우리에게 “구원은 생명에서 온다”라는 위로와 가능성을 건넨다. 독자들은 이 시집을 통해 오랜만에 시적 깊이와 마음의 위안을 동시에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멸종
주영헌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마지막 사랑의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류는
완벽한 멸종을 예약하고야 만 것입니다.
벼락 맞을 각오로,
당신이
사랑을 싹틔우지 않는다면
* 브라질 국립원주민재단은 2022년 7월 외부 세계와 접촉을 차단하고 홀로 브라질 정글에서 생활하던 한 부족의 마지막 원주민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는 지난 26년간 아마존 정글 깊숙한 타나루 원주민 지역에서 홀로 살았다고 전해지며,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달아실,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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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차(茶)
주영헌
얼음으로 조각한 횡와상(橫臥像)처럼
당신, 흘러내립니다.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던 샘이 터진 것입니까.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들
멈추지 않습니다.
저 고인 샘물을 내가 마신다면
당신 슬픔의 내력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의 주름에 미어진 아픔의 알갱이
그 하나하나를
내 마음처럼 주워 모아
목에 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눈물로
찻물을 끓여 차를 마십니다.
당신이라는 비중으로 한껏 무거워진 푸른 찻잔
사랑해서,
당신을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당신이 얼마나 쓴 마음 흘렸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달아실,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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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잘살아야 합니다
주영헌
나, 고개조차 들 힘이 없습니다. 공평한 쉼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루를 쪼개고 또 쪼개며,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살아갑니다. 세상은 톱니바퀴입니까. 구르는 저 바퀴, 다 닳아 속력을 잃을 때까지 헛바퀴 돌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나락(奈落) 속에 천국이 있겠습니까. 나, 천국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배교도에게 천국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실 같은 지옥만 있을 뿐입니다.
“왜?”라는 물음을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누구를 위하여 오늘을 견디며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까.
아, 어렴풋한 기억 속의 당신,
당신, 잘 살아야 합니다.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달아실,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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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人
주영헌
우리는 한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원주민이라는 주민등록증도 있습니다.
봄철이면 중국발 황사를 다 함께 호흡합니다. 우리는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월드컵에는 붉은 옷을 입고, 함께 큰 함성을 질렀습니다. 올림픽을 보며 ‘영미!’라고 같이 외쳤습니다.
당신과 나는 한국말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당신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도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안녕’이라는 말까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니까’라는 말도 이해하겠습니다. 주어와 동사, 단어, 그 낱낱의 의미는 이해하겠는데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목청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보니 감정의 격함은 알겠는데,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자, 목소리를 낮추고, 우리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이 말은 이해하시죠.
당신 말을 한국어 ‘가’라고 부르고 내 말을 한국어 ‘나’라고 부릅시다. 누군가 우리 사이에 낀다면, 한국어 ‘다’라 부릅시다.
우리,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까?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 달아실, 2026.
자본주의의 소외와 시대적 비극을 관통하는 서늘한 통찰과 구원의 서사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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