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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현’을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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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6. 10. 1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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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우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앵그르의 바이올린』 더푸른시인선으로 발간

 

 

 

하린 기자

 

  2008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선우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앵그르의 바이올린』을 더푸른시인선으로 펴냈다. 시집으로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 『홍도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 『하나님의 비애』, 『섬의 오디세이』, 『임자도 홍매화에 매혹되다』 등을 발간했으며, 제주기독문학상, 전북 해양문학상, 목포문학상 남도작가상, 계간지 우수작품상, 전라남도 문화상 문학부문 등을 수상한 바가 있다.

 

  다섯 번째 시집 『임자도 홍매화에 매혹되다』에서 박선우는 뛰어난 역설과 섬세한 묘사를 통해 꽃을 살아 있는 실체로 감각하고, 홍매화·튤립·맨드라미·감자꽃·여뀌꽃·소금꽃 등 다양한 꽃을 매개로 ‘꽃의 미학적 파노라마’를 펼쳐 보였다. 대상에 대한 직관과 내밀한 경험에서 길어 올린 시적 감각은 꽃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게 했다.

 

  이번 시집 『앵그르의 바이올린』에서 시인은 음악적 요소인 ‘현’을 매개로 슬픔을 예술적으로 승화한다. 슬픔의 근원을 더듬으며 타자의 고통을 우리의 감각으로 확장해 나가는 시편들을 담고 있다. 한층 내밀하고 섬세해진 시 세계에서 슬픔은 서로 다른 존재들을 잇는 울림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슬픔은 한 개인의 내면에 고인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황정산 평론가는 해설에서 슬픔을 “세계를 읽는 인식의 방식이며 다른 존재에게 다가가는 공감의 능력”으로 바라본다. 시인이 슬픔의 소리를 따라 그 근원을 추적하고, 서로 다른 장소에 놓인 존재들이 울음이라는 감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박선우의 시는 추상적인 슬픔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독자에게 깊은 공감과 실감을 전한다. ‘이미지의 현’을 통해 타인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나아가 우리의 슬픔으로 확장하며 시를 통한 ‘울음의 연대’를 이루어 낸다. 이 과정에서 시인의 시선은 더욱 내밀해지고 표현은 한층 섬세해진다.

 

  또한 이 시집의 슬픔은 슬픔 자체에 함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을 통해 대상의 본질과 근원을 감지하고,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하는 시적 내공을 보여 준다. 슬픔과 함께 춤추며 그 너머의 삶을 발견하는 것이다.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슬픔을 경험했거나 그 곁을 지나고 있는 독자들에게 슬픔 또한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음을 일깨운다. 나아가 슬픔을 밀어내야 할 감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하며, ‘슬픔의 현상학’을 깊이 있고 친밀하게 경험하도록 이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물마루

 

박선우

 

새는 지문이 없다

 

나무 위에 제 이름 한 자 새기지 못하고

오직 허공을 빌려 부리로 흔적을 남긴다

 

기류의 관절을 꺾어 비상의 대가로

바람의 나이테를 새긴다

 

지나간 자리는 이내 여백이라 하지만

바람의 결마다 새가 흘린 깃털의 문법이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동심원으로 박혀

밤새 파닥이는 소리를 낸다

 

그것은 지문 없는 존재가 생애를 다해 쓰는

투명하고도 역동적인 수표

 

땅 위엔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아도

새가 지나간 하늘은 온통 일렁이는 물마루

 

바람이 잠시 그 오목한 골에 머물렀다가

이내 푸른빛의 여백으로 흩어진다

―『앵그르의 바이올린』, 더푸른, 2026.

 

 

-

 

앵그르의 바이올린

 

박선우

 

샤워하는 그녀의 등줄기에 나비 한 마리 앉는다

 

미끄러지는 물방울이 곡선을 타고 보이지 않는 현을 켠다

 

등을 보인 그녀는 팽팽한 활처럼 휘어지고

 

침묵 아래 잠들어 있던 음계들이

 

젖은 살결을 따라 천천히 깨어난다

 

조이면 조일수록 음악은 더 높이 차오르고

 

악보 없는 악기는 거듭되는 조율 끝에 봄을 향해 건너온다

 

물방울이 튕겨 올린 은밀한 공명

 

나비는 어느새 날아가고

 

젖은 등 위에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두 개의 f자

―『앵그르의 바이올린』, 더푸른, 2026.

 

-

 

윌리엄스 증후군

 

박선우

 

본 적 없는 당신의 웃음이

내 시의 행간마다 먼저 와 앉아 있다

7번 유전자가 제 몸을 헐어낸 자리

그 빈칸을 채우려 누군가는 다정의 설계를 시작했을 것이다

지도는 그릴 줄 몰라도 바람의 무늬는 외우는 사람

당신에게 세상은 좌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연주회다

낯선 이의 소매를 붙잡고 안부를 묻는 것은

당신의 심장이 너무 뜨거워

혼자서는 다 식힐 수 없기 때문일까

경계라는 단어를 배운 적 없는 입술 위로

어제 본 구름의 리듬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퍼즐 조각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흩어져도

당신의 귀는 숲의 미세한 숨결을 놓치지 않는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더 오래 노래할 수 있다는 뜻

지워진 유전자는 결핍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소음을 음악으로 번역하기 위한

당신만의 하얀 여백일지도 모른다

마주친 적 없는 당신이 내민 손이

오늘 밤 내 마음 안에도 따뜻하게 전해져온다

―『앵그르의 바이올린』, 더푸른, 2026.

 

-

 

누락된 페이지

 

박선우

 

47쪽 다음은 49쪽이다

종이의 결은 온전하고 잉크의 농도는 일정하다

제본은 단단하고 서사는 매끄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들이 앓았던 하루는 어디에도 없다

 

앞 문장은 기억을 잃고

뒤 문장은 부재를 봉합한다.

갈 곳 잃은 주어는 부표처럼 떠 있고

동사는 서둘러 마침표 속으로 숨는다

 

이 책의 배열을 지시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들이다

비워 둔 자리가 다음 행간의 간격을 결정하고

누락은 투명한 벽이 되어 읽어야 할 진술들을 가둔다

 

누구도 항의하지 못한 채

손가락은 무심하게 장을 넘기지만

책장 사이 어딘가에서

지워진 소리가 마른 뼈처럼 바스락거린다

 

파본의 세계는 이토록 정교하고 완벽하여

우리는 결코, 그 48쪽에 도착하지 못 한다

생은 늘 한 페이지가 모자란 채로 완성되고

우리는 누락된 그늘 위에 서서 서로의 이름을 오독할 뿐이다

―『앵그르의 바이올린』, 더푸른,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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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기자 2008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선우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앵그르의 바이올린』을 더푸른시인선으로 펴냈다. 시집으로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 『홍도는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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