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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시인선으로 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2. 12. 3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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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시선, 기다림의 미학

 

하종기 기자

 

김상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 202212)을 펴냈다. 1990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이래 박인환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한 김상미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공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여 생의 진실과 비밀에 마주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절제된 시인의 화법, 유사한 시어의 반복을 통해 리듬과 변화를 창조하는 그의 매혹적인 표현법은 이제 어떤 경지에 이른 듯하다”(전봉건문학상 심사평에서)라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시인은 시력 삼십여 년 동안 한시도 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시세계를 공고히 해왔다. 그런 시인이 이번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에 이르러 설사 시가 아니라 해도/ 삐뚤삐뚤, 비틀비틀, 넘어지고, 엎어지면서도/ 나는 계속 시를 써왔다”(‘시인의 말에서)는 말을 증명하듯, 메마른 어제의 생에서 기어코 건져 올린 시어들로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순정하게 시 쓰기와 시인 됨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 한다.

 

구모룡 평론가의 해설처럼 시집 속엔 시인은 어떠한 존재이고 어떠한 삶을 사는가? 김상미의 시편에는 유독 이러한 질문이 많다. 그는 시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시인됨을 끊임없이 되묻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시에 대한 시인의 갈망은 불가능, 한계, 무기력, 허기의 정동에 사로잡히게 한다.”

 

기교를 줄이고 담백한 문장으로 시적 정황을 매력적으로 풀어나가는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는 지금 여기에 가라앉아 있는, 생의 안쪽에 깃들어있는 존재론적인 물음에 대한 진솔한 시적 탐구에 가깝다. ‘~하는 척을 하지 않으면서 생을 관통하는 자리를 솔직담백하게 읽어내는 시를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엄마의 통장

 

김상미

 

엄마의 통장을 어떻게 하나?

내 통장 상자에 아직도 들어 있는 엄마의 통장

이제는 쓸 수 없으니 버려야 하는데

객지에 사는 딸이 매달 부쳐주는 용돈을

딸이 보내는 반가운 편지인 듯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돌아가시면서 건네주시던 그 통장

그 통장의 돈을 형제들과 똑같이 나누면서 펑펑 울었던

, 우리 엄마의 통장

그 내리사랑을 어떻게 하나?

이제는 훨훨 태워 자유롭게 보내드려야 하는데

아끼고 아껴서 자식에게 되돌려줄 기쁨에

불어나는 통장 액수만큼 몇 배로 검소하셨을 우리 엄마

그 착한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일거리가 없는 달엔 하루 한 끼만 먹고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엄마의 용돈

그 용돈 보내는 재미로 힘내며 힘차게 살았는데

이제는 그 재미 사라진 지도 어느덧 십여 년

은행에 가기 위해 통장을 꺼내는데

그 아래에서 삐죽 고개 내밀며 활짝 웃는 엄마의 통장

나도 모르게 엄마, 은행 다녀올게!

꾸벅 인사하는 나

아직도 엄마의 손길, 엄마 냄새 가득한

착하디착한 그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창밖엔 엄마가 그리도 좋아하던 수국이 한창인데

나는 그 수국조차 엄마가 남긴 그리운 유품 같아

눈시울이 자꾸만 붉어지고 붉어지는데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12.

 

 

문학이라는 팔자

 

김상미

 

어느 날, 아르튀르 랭보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시를 자신에게서 산 채로 잘라내 버렸다. 로베르트 발저는 스스로 헤리자우의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가 27년간 아무것도 쓰지 않고, 죽을 때까지 종이봉투만 접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꼼짝없이 사로잡힌 시라는 괴물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가스오븐에 자신의 머리를 처박아 넣었다. 아틸라 요제프는 먹고살기가 너무 막막해 달려오는 화물열차에 몸을 던졌다.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둔 28세의 윤동주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생체실험을 당했다. 산도르 마라이는 조국을 등지고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세상에 아첨하느니 사색하는 인간으로 사멸하겠다며 권총 자살을 했다. 하트 크레인은 사랑이라는 환상을 쫓고, 좇다 무너진 탑이 되어 푸른 카리브해 깊숙이 가라앉았다. 프리모 레비는 그 지독한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았으나,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투신자살했다.

 

그들은 모두 내가 사랑한 문학,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문학, 세사르 바예호의 시구처럼 이 아픈 날 태어난팔자들이다.

 

나는 내가 나 같지 않고, 삶이 삶 같지 않고, 문학이 문학 같지 않고, 친구나 동료가 친구나 동료 같지 않고, 내가 알던 정의신념가치사랑 같은 숭고한 단어들이 내가 모르는 비릿한 단어들로 변해 세간에 마구 유통될 때,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져 온몸과 온 마음에 비통과 회한뿐일 때, 이 여덟 명의 작가들을 만나러 간다. 그들의 팔자를. 문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더럽게 불운하고, 더럽게 치열하고, 더럽게 품격 있고, 더럽게 자존이 강했던 그들의 팔자. 나 자신이 위로받으러 갔는데, 오히려 내가 감화되어 울고 나오게 되는 그들의 팔자. 그런 팔자임에도 그 지독한 불운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들의 문학. 그 시퍼런 도끼날에 세례를 받고 오면, 내 팔자 또한 더럽게 춥고, 어둡고, 외롭고, 고달파도, 그들과 함께 계속 문학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뜨거운 피가 솟구친다. 그 어떤 곳보다도 팔자 사나운, 문학이라는 한 장소에서, 동시에!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 20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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