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코끼리의 힘
조명
보아라, 나는 선출된 여왕이므로 곧 법이다
가장 강한 그대는 우리들의 길잡이, 나의 남편이 되어라
선두에 서서 몸 바치는 백척간두의 생
최고의 건초와 여왕의 믿음을 받으라
행여, 그대가 독불장군의 힘을 믿게 된다면
나는 뭉쳐진 무리의 힘을 사용할 것이다
짓밟힌 만신창이로 추방될 것임을 미리 알라
두 번째 강하고 매력적인 당신, 그대는 여왕의 경호원 애인
나의 배후에서 우리들의 길잡이를 견제하라
달콤한 건초와 은밀한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대 또한 징벌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잊지는 말라
부드러운 경고는 두어 번뿐이다
우리는, 씨방을 말리는 건기의 샘을 찾아가는 여정
나의 무리들은 모두 기억하라
한 마리 코끼리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나는 너희들과 함께, 젖줄과 숨줄과 힘줄로 한 덩어리 되어
한 마을을 초토화할 것이다
천둥과 폭풍과 해일을 넘어서는 힘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한 조각 정신의 이탈도 없이
생이 버거운 너무 커다란 몸뚱이를 뚜벅이면서
종족보존, 그 운명적 목표를 위한 젖샘에 도달할 것이다
그날의 노을은 유독 붉은 핏빛이 아니겠느냐
공룡은 죽고 코끼리는 살아남았느니라
한 무리 사자가 한 마리 코끼리를 어려워한다
온갖 초식동물들이 코끼리와 더불어 한가롭다
― 『여왕 코끼리의 힘』, 민음사, 2008
모계의 꿈
조명
할머니는 털실로 숲을 짜고 계신다. 지난밤 호랑이 꿈을 꾸신 것이다. 순모 실타래는 아주 느리게 풀리고 있다. 한 올의 내력이 손금의 골짜기와 혈관의 등성이를 넘나들며 울창해진다. 굵은 대바늘로 느슨하게, 숲에 깃들 모든 것들을 섬기면서. 함박눈이 초침 소리를 덮는 한밤, 나는 금황색 양수 속에서 은발의 할머니를 받아먹는다. 고적한 사원의 파릇한 이끼 냄새! 저 숲을 입고 싶다. 오늘 밤에는 어머니 꿈속으로 들어가 한 마리 나비로 현몽할까? 어머니는 오월 화원이거나 사월 들판으로 강보를 만드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백여섯 개의 뼈가 뒤틀린다는 진통의 터널, 나는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 『여왕 코끼리의 힘』, 민음사, 2008
세족
조명
바다가 섬의 발을 씻어 준다
돌발톱 밑
무좀 든 발가락 사이사이
불 꺼진 등대까지 씻어 준다
잘 살았다고
당신 있어 살았다고
지상의 마지막 부부처럼
섬이 바다의 발을 씻어 준다
―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민음사, 2022.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조명
한번, 태어나 볼까요?
아랫녘으로 내려갈수록 물색 짙어지는 봄날
태양은 빛의 구멍을 열어 색의 연풍을 보내 주어요
나는 바야흐로 색의 씨앗, 당신은 빛의 씨앗
흠 없는 외로움 흠 없는 그리움을 서로 알아요
애초의 어둠 속 반짝임을 알아요
반짝임은 사랑의 핵, 생명을 만들죠
수원 떠나 옥천 지나 금강 건너 금산 골짜기 돌샘
애타는 당신 지상의 이슬방울들 물들일 때
초록 목덜미와 다홍 가슴으로 발색하는 외로움
청남색 등때기와 홍자색 배때기로 발색하는 그리움
청홍 자웅 아지랭이 진동합니다
나는 바야흐로 몸의 씨앗 당신은 존재의 씨앗
토우의 심장에 숨결을 불어넣는 가루라(迦樓羅)처럼
귓불 지나 유두 지나 소름 돋는 합일의 벼락처럼
당신,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태양이 먼지로 사라질 때까지 벗을 수는 없죠
한 마리 자연 속 한 마리 자연으로
한번, 태어나 볼까요?
―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민음사, 2022.
람람싸드야헤*
조명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여행자의 오후
네 명의 형제들 들것 꽃상여 메고 골목을 달려간다
수백 송이 서광꽃 아래 시신으로 누워 가벼워지는 내 몸
아득히 나를 통과하는 시장통 하늘의 뭉게구름들
아이들 소리 장사꾼들 소리 병든 소 울음소리
나는 지금 어디를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 겁니까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강변 콘크리트 계단에서 시신들 지글지글 타는 노을녘
운구 행렬은 황토색 강물 앞에 나를 내려놓는다
하늘로 향한 앙상한 맨발을 가로지르는 유장한 강물
타다 남은 해골 그루터기들 품에 안은 갠지스 어머니
어머니,
나는 고래 같은 내 아들들 더 키워야 합니다
어머니,
나는 코끼리 같은 내 딸들 더 키워야 합니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확연한 물방울 유두를 깊숙이 물어라
한 모금의 신으로 죽음을 지나가는 여행자의 안쪽 다 씻어라
홍고추 청솔잎의 금줄을 끊는 새벽을 가라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신들 잡귀들 어슬렁거리는 저물녘 옥상 화장터
나는 장작더미 위에 누워 장작더미를 덮는다
코끼리 날개 좇아 빨빨대던 영욕의 알몸
입 닫은 한 생애 위로 신화 이전의 밤이 밀려온다
장작개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모자이크된 별들의 은하
나는 지금 어디로 어떻게 건너가고 있는 겁니까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축축한 시신은 푸시시 보송한 시신은 활활
살이 타고 연골이 타며 벌떡, 일어났다 털썩, 주저앉는 해골들
누런 늑골 열리자 푸른 밤하늘로 어둠이 콸콸 흘러 나가고
내 철없는 두개골은 난간 넘어 지붕들 건너뛰어
데굴데굴데굴데굴 가파른 계단을 굴러 풍덩, 갠지스 어머니!
감람나무 그늘 아래 보리수 그늘 아래
두고 온 새끼들 핥고 빨며 나는 더 살고 싶어요!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확연한 물방울 유두를 깊숙이 물어라
한 모금의 신으로 죽음을 지나가는 여행자의 안쪽을 다 씻어라
홍고추 청솔잎의 금줄을 끊는 새벽을 가라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꽃불의 몸 불꽃의 마음
가차없이 재로 수습되는 푸르스름 꼭두새벽
촛불 밝힌 풀잎 꽃배들 붉은 강물을 건너간다
반 남은 생수병에 신을 채우고 돌아서는 여행자 등 뒤로
어둠은 또 사라지고 여명은 또 밝아 오고
늙은 걸인들 시장통 공터를 쓸고 단정히 도열해 앉으시고
세수하고 머리 빗은 아이들 등짝보다 큰 책가방을 메고
커다란 학교 속 조그만 학교로 공부하러 가신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람람싸드야헤!
* ‘신은 알고 계신다’라는 뜻으로 바라나시에서 시신을 운구할 때 구령처럼 외치는 말.
―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 민음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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