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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푸른사상시선으로 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4. 10.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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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세계관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시집

 

 김휼 기자

 

박석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가 푸른사상시선으로 출간됐다. 시집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겪게 된 한 개인의 고통과 그에 따른 가족사, 음울한 도시의 풍경과 소시민의 삶이 형상화되어 있다. 시대적 수난 속에서 온몸에 새긴 삶의 감각과 절망의 노래가 아프게 다가오는데, 시인은 절망에 함몰되지 않고 강인한 삶의 의지와 응전 의식을 보여준다.

 

시인은 중학교 2학년 때 집안의 파산을 겪었고, 대학교 1학년 때 남민전 사건에 관련된 형들이 수감되었다. 그로 인해 허약한 몸인데도 가정을 책임지며 돈을 벌어야 했다. 형들 사건 때문에 1983년에 안기부에게 각서를 쓰고 교사가 되었는데,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위해 해직을 선택했다. 자유를 바라고 피폐하지 않는 삶을 바라며 살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쉽게 그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꽃나무가 주는 자극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짙은 마음을 쏟겠다고 말한다. 세계를 낭만적 감성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문학적 감성으로 껴안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시의 행간에 흐르는 상실의 이미지들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에이게 한다. 돈도 없고, 사랑해줄 사람도 없어서 살아온 육십 년이 거리에 흩날리는 폐지 같다는 그의 마음과 시공간의 잔상이 폐허를 보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읽는 동안 시인 이상과 기형도의 모습이 가끔씩 오버랩 되기도 했다.

 

애잔하다 싶으면 그의 격정에 놀라고, 가냘프다 곰곰이 마주하면 그의 강인한 삶의 의지와 불굴의 응전에 경외하게 된다. 깊은 데서 배어 나오는 설움의 힘에 망연하게 포획될 수밖에 없는 저 유장함. 그런 이야기사건들과 사람들로 가득한 시집의 시들이 서럽고도 질펀하다라고 추천사를 쓴 조진태 시인(5.18 기념재단 상임이사)의 말처럼 그는 연약한 몸 안에 강한 의지를 품고, 자신의 경험맥락과 사람들을 향한 정서적 국면을 시화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발문을 쓴 조성국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시인의 생애사가 민낯으로 살아서, 진심으로 살아서,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의 숨소리가 살아서 지금-여기이른 것이며, “그리하여 그의 시는 우리들을 시공간으로 데려가서는 세월의 체로 걸러내듯 빚어낸 신념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무비즘(movieism)

 

박석준

 

나는 영화처럼 걸어간다

영화는 나를 찍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영화처럼 만난다

어느 날 나를 한 사람은 영화처럼 기억하고

또 한 사람은 영화처럼 기억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영화처럼 기억하고‥‥‥

 

나는 잠깐 사진으로 스치어

나는 잠깐 녹음으로 스치어

나는 잠깐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찾아들고

나는 잠깐 꿈으로 사람들에게 찾아들어

 

나는 앞뒤 옆 사람들의 속으로 영화처럼 걸어간다

영화는 살아가는 나를 한순간도 찍지 않았지만

 

나는 무비즘을 추구하고

건물들과 바깥 나무들, 길과 길 위의 차들, 사람들

밤하늘 아래 불빛, 밤비, 낮비, 눈 흐르는 도시에서

나는 영화처럼 택시 타고 가고 있고 영화처럼 걸어간다

나는 영화처럼 움직인다

 

나는 밤의 소줏집 유리창 가에 세 사람하고 앉아 있고

저녁에 불안해 보이는 걷는 사람 뒤에 걷고 있고

낮 카페에 커피잔 위에 말이 없고

아침 병원 안에 서 있고

새벽길에서 도시 정경을 바라보고 있고

나는 종이에 쓰고 있고 컴퓨터 앞에 앉아 쓰고 있고

스마트 폰으로 유라이어 힙의 레인*을 듣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고흐는 비 내리는 날에 없다

 

나는 영화처럼 살고 있다

영화처럼 잠깐씩 움직이고 있다.

 

*<Rain>: 록 밴드 유라이어 힙(Uriah Heep, 1969~ )의 노래(1972).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1889).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푸른사상,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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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 까닭에

 

박석준

 

형이 교도소에 9년 넘게 수감되었고

출감하여 거리에 나온 지 6년이 지났지만

나는 알 수 없었다.

형이 나에게 화분을 가지고 따라오라 했는지.

37킬로 매우 가벼운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왜

너무 무거운 25킬로 꽃 화분을 간신히 들고 가는지.

형이 (건물들이 높낮이로 그림을 그리며

차들 사람들이 이쪽저쪽으로 흘러가는 낮 유동 거리)

푸른 가로수들이 서 있는 인도를 걷다가 갑자기

만난 나보다 어린 청년에게

호주머니에서 꺼낸 봉투를 뜯어 삼십만 원

돈을 왜 다 주었는지.

점심때 내가 그 봉투에 넣어서 어머니께 드린 용돈이

길에 봉투만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내 무게로 버틸 수 있는 한에서 일을 한다

는 생각이었다

나는 내 가진 돈으로 사람 만난다

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광주 교도소에서 오늘 출감했어요, 란 말을 들었고

그 청년은 청년인 나를 그냥 지나쳐 그 길을 걸었다.

형은 귀한 화분이니까 조심해라 했을 뿐이었다.

나는 3미터쯤 걷고는 화분을 내려놓곤 하였다.

나는 30분쯤 형의 뒤에서 걸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귀한 꽃나무여서 택시를 타지 않은 걸까? 나보다?

 

그 후, 그 청년은 어디론가 갔을 텐데,

어머니는 14년을 형은 22년을 세상에 살아서

5년 전에 나는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여름 푸른 오후의 길을 지나간 까닭에

지금은 여름이고 내가 산 세상은 아름다웠다.

사람은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므로)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푸른사상,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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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의 말

 

박석준

 

시간 길을 따라 계절이 열두 번 가고

나는 그 골목길을 걸어가네

 

골목길을 걷다가

내 그림자가 벽에 져서

낯이 사라진 벽을 보았네

 

떠났어, 서울 지하철 역에서,

잘 있거라, 거울 속 얼굴들아 조선대 언덕의 말들아.

사람들한테 들어서 낯익은 말들인데,

마음이 궁글어

무디어진 사람의 얼굴이 모습이

나를 그곳에서 망설이게 하네

 

그 사람의 말 없음에, 사랑을 잃고

내 젊음이 사라졌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푸른사상,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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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 푸른사상시선으로 출간 - 미디

김휼 기자 박석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니』가 푸른사상시선으로 출간됐다. 시집엔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겪게 된 한 개인의 고통과 그에 따른 가족사, 음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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