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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모래는 뭐래』 창비시선으로 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5. 2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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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처럼 빛나는 시어로 비춘 삶의 내밀한 풍경

 

 

하린 기자

 

 

시 창작과 평론 활동을 병행하며 독특한 상상력과 빼어난 언어 감각으로 독보적인 시 세계를 다져온 정끝별 시인이 일곱 번째 시집 모래는 뭐래를 창비시선으로 발간했다.

 

시인은 경쾌한 어조와 그윽한 서정이 결합된 작품으로 삶의 비밀한 일상과 가족 여성 사회 생태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려준다.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감성으로 삶의 비애와 도저하고도 낭창낭창한 슬픔”(이병률, 추천사)을 감싸 안는 시편들은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치밀한 미학적 구성도 눈여겨볼 만하다. 언어를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부리면 부린 자리로부터 울림과 떨림의 번져온다. 그런 정교함으로 인해 시 읽기의 깊은 맛이 우러난다. “언어적 조율을 통해 일상의 삶, 평범한 사람, 퇴색한 사물의 이면에서 숨은 비밀을 발견하고 그것에 합당한 이름을 붙여준다”(심사평)라고, 찬사를 받았던 2021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한 이 시는 세개의 새 시입니다가 좋은 예에 해당한다.

 

시집을 펼치면 절묘하게 짜인 애너그램을 활용한 시들이 단연 눈에 뜨인다. 애너그램은 라임의 미학을 이루기도 하여, 마치 랩을 듣는 듯 시의 운율을 만끽하게 한다. 그러나 정끝별의 시에서 애너그램은 단순히 시적 리듬감을 위한 형식이나 언어유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동일한 모음과 자음을 재조합해 연결한 정교한 적요” “무한한 하문” “살벌한 발설” “미망의 마임”(시다 시, 다 시다!) 같은 표현들은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 “우직한 궁지에 몰린 염소의 소명” “고통의 옥토에서 응전하는 증언”(같은 시) 등의 시구 또한 언어를 통해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의 모습을 탁월하게 대변한다. 시의 형식과 내용이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답게, 우발적이며 감각적인 방식으로 결합하며 시가 무엇인지, 시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보여주”(황인찬 시인의 해설)는 시집을 근래에 보지 못했다.

 

시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노력, 끊임없이 세상을 탐구하고 질문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무구한 목소리가 모래는 뭐래에 담겨져 있다. 시의 지향과 그로 인한 숙명적인 좌절,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를 쓰면서 지금-여기를 아름답게 증언하는 시집 모래는 뭐래를 읽으면, “시의 언어들이 내딛는 안간힘”(이건 좀 긴 이야기)을 그러모아 희망의 서사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정끝별 시인의 세계에 대한 애정이 보일 것이다.

 

 

 

 

< 시집 속 시 맛보기 >

 

 

이 시는 세 개의 새 시입니다

 

정끝별

 

# 새들은 그림자가 없어요

 

땅에 붙어서 걷는 그림자는 크고

땅에서 가까이 나는 그림자는 작다

 

땅을 벗어난 것들의 그림자는? 없다!

 

꿈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아요 그림자를 놓쳤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길에도 집에도 잃어버린 신발에도 죽은 아버지에게도 없어요, 꿈에는 그림자가 없어요

 

펼쳐야 날 수 있고 날아야 잊힐 수 있다는데

접힌 기억을 죽지에 묻고 또 묻는다

나는 내게도 보여줄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어깻죽지를 펴고 빠르게 달릴수록 튀어 올라요, 높이 날수록 허공에서 흩어져요, 그건 새였을까요?

 

공중부양하는 것들에겐 그림자가 없고

내 그림자엔 새가 없다

 

 

# 수평선처럼 흔들렸어요

 

자세가 바뀌면 지평이 바뀐다 지평 위 그림자의 농도나 온도나 각도나 차도도

 

어쨌든 새는 게 실패가 아니다

가장 뜨거운 눈물 아래로는 겹겹의 파도가 있고

파도와 파도 너머로는 한줄 실선이 있다

 

방파제에 이른 눈물의 실선이 지평이다 새의 시작이다

 

간절했던 꿈 밖으로 방금 넘쳤거나 곧 넘칠 파도가 벌벌 떨고 있어요, 벌이었어요, 층층의 구름과 가장 먼 하늘이 엎질러졌어요, 그건 수평선이었을까요?

 

꿈에서 흘러나온 바다가 지문처럼 일렁이며 이랑을 새긴다

꿈도 아니었는데 바닥이 바다처럼 출렁인다

 

웅크리면 길은 홈이 되고 홀이 되어 나를 삼키고

 

지평을 바꾸다보면 언젠가 탈출할 수 있으니

무엇이든 돼! ! ! 무엇이어도 괜찮아, 괜찮아,

 

엎질러진 그림자라면 더욱

 

 

# 그림자가 날 일으켜 세워요

 

하나의 빛을 향하면 그림자도 하나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그림자는 깊고 뜨겁고

깨면 잊히는 꿈처럼 그림자는 있고 없다

 

뒷배인 듯 제 그림자를 끌고 가는 날엔 태양에 이마가 타들어 가고, 앞배인 듯 제 그림자를 안고 가는 날엔 태양에 뒤통수가 다 다 타들어 간다, 길에 새긴 문신처럼

 

실선을 넘어선 것들에게도 없다

옥 규 숙 영, 악보를 벗어난 음표처럼 휘리릭

어디로 갔을까 모으고 모았던 우표나 종이학처럼 소식조차 잊고 이름마저 그림자를 잃었지만

 

아직 내겐 두 발로 써야 할 길의 역사가 있고 타들어가면서도 마주해야 할 빛의 역사가 있어요, 바닥이 없으면 길이 없고 그림자라는 빛의 뒷배가 없으면 하, 나도 없는 거예요

 

나와 하나인 것들과 내게 하나인 것들과 나를 하나이게 한 것들이 있으니 내 그림자도 하나

 

저녁 무렵일 때 새는 가장 낮고 가장 향기롭다

밤이 오면 크나큰 그림자를 가진 날개가 날 덮어줄 것이다

 

― 『모래는 뭐래,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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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값

 

정끝별

 

얼마나 오래 혼자인가요?

얼마나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얼마나의 해저를

산 채로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다

 

두 눈이 불거지고 온몸이 투명해져 스스로 빛을 낼 때면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마침내 심해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다 언제나 너는

 

― 『모래는 뭐래,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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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모래는 뭐래』 창비시선으로 발간 - 미디어 시in

하종기 기자 시 창작과 평론 활동을 병행하며 독특한 상상력과 빼어난 언어 감각으로 독보적인 시 세계를 다져온 정끝별 시인이 일곱 번째 시집 『모래는 뭐래』를 창비시선으로 발간했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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