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채인숙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에서 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5. 29. 11:45

본문

여름 가고 여름이 오는 행성에서 다음 생으로 보내는 전생의 노래

 

 

 

 

리호 기자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시작한 채인숙 시인이 등단한 지 8년 만에 첫 시집 여름 가고 여름(민음사, 2023)을 출간했다.

 

채인숙 시집의 주 공간은 그가 거주하는 인도네시아다. 그의 데뷔작 1945, 그리운 바타비아역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배경으로 쓴 시다. 이국적인 풍경 안에서 식민지라는 공적 기억과 사랑이라는 사적 기억이 섞이며 만들어 내는 독창적인 정조가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모습으로 재현된다. 구체적인 사건으로서는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다르지만, 그 서사의 보편성은 바타비아의 밤을 특정한 시공간에서 벗어나게 한다. 채인숙 시의 주된 공간이 갖는 특수성은 공통된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보편성을 취득한다. 소리를 죽여 혼자 우는 자바의 물소나 깜보자 꽃송이, 자바의 검은 돌계단 같은 이방인들의 단어도 어느새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된다.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는 노래는 낯설지만 편안하다.

 

열대에 부는 찬 바람은 따뜻한 느낌일까 차가운 느낌일까. 언젠가 이국에서 맞았던 훈풍은 그때 그 감각을 잊을 수 없는 유일한 바람이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던 그 바람은 바람 그 자체였다. 그저 움직임만이 느껴졌다는 점에서 순수한 바람이기도 했다. 시집을 펼치면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시 디엥고원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순식간에 우리를 한 계절이 되풀이되는 열대의 섬나라로 이동시킨다. 뜨거워졌다 차가워지기를 반복하는 내면을 품은 사람들은 바깥을 에워싼 지독한 한결같음을 어떻게 견딜까. 그때 시인의 눈에 들어오는 건 가장 단순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땅의 뜨거움과/ 하늘의 차가움을 견디기 위해 화산재를 밟으며 사라진 사원을 오르는 여자들. 더 바라지 않는 경지만이 다다를 수 있는 초월의 상태 속에서 인내와 정화의 상징이자 지금은 잃어버린 재의 서사가 무심코 일어선다. 그들의 이야기는 순수한 바람 같고 또 지독하게 한결같다. 추천사를 쓴 허연 시인은 채인숙의 시를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가슴 한쪽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별의 술상에서 불렀던 노래처럼. 생을 관통해 그리워했던 사람에게 끝내 못 참고 쓴 편지처럼. 그러나 불태워 버린 편지처럼. 채인숙의 시에는 재가 되어 버린 서사가 있다. 현대시가 잊고 있었던 재의 서사가 열대의 나라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잃어버린 재의 서사가 갖는 의미를 강조했다.

 

시집에는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는 왕복운동에 관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밤이 오고 밤이 갔다거나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갔다는 식, 또는 파도가 가고 파도가 온다와 같은 왕복운동에는 떠나는 행위와 돌아오는 행위의 반복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움은 이토록 오고 가는 동사의 모습을 취한다. 시는 병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그리움을 달래는 치유의 기록이기도 하다. 속절없이 여름이 반복되는 계절과 무관하게 내면은 덜컹거리며 오고 갈 때 습기의 무기가 무거워지면 마음엔 스콜처럼 시가 쏟아졌다. 시집의 후반부는 시로 안부를 전하고 시로 안부를 물었던 시간들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하다. 이상한 식물과 수상한 동물들의 나라에서 출발한 시원적 그리움이 열대에 부는 찬바람에 섞여 우리에게 날아든다. 어떻게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마다 습작한 시의 형체로, 그칠 수 없는 존재의 형식으로.

 

한편, 채인숙 시인은 라디오와 TV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다가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여 현재까지 교포로 살아가며, 인도네시아 문화예술을 소개하는 글을 쓰는 등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수석편집장 직책으로 인도네시아 한인사 100년사를 엮기도 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여름 가고 여름

 

채인숙

 

시체꽃이 피었다는 소식은 북쪽 섬에서 온다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뿌리며

가장 화려한 생의 한때를 피워 내는

꽃의 운명을 생각한다

 

어제는 이웃집 마당에서 어른 키만 한 도마뱀이 발견되었다

근처 라구난 동물원에서 탈출했을 거라고

동네 수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밀림을 헤쳐 만든 도시에는

식은 국수 면발 같은 빗줄기가 끈적하게 덮쳤다

 

밤에는 커다란 시체꽃이 입을 벌리고

도마뱀의 머리통을 천천히 집어삼키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묵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

 

납작하게 익어 가는 열매를 따먹으며

우리는 이 도시에서 늙어 가겠지만

 

꽃은 제 심장을 어디에 감추어 두고 지려나

 

여름 가고 여름 온다

 

 

―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 2023

 

--------------------

 

다음 생의 운세

 

채인숙

 

다시 태어나면 살던 마을을 떠나지 않으리

지붕 낮은 집에서 봄을 맞고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고 겨울을 지나리

뒷산에서 주워 온 나무 둥치로 의자를 만들어

눈이 멀도록 저녁놀을 보리

가지런히 발을 모으고 앉아 먼 나라의 당신이 보내온 엽서를 읽으리

내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아이들을 낳아 늦가을 별 같은 곁을 내어 주리

사랑에 실패하고 우는 아이 옆에서 함께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리

누군가 떠났고 누군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천변에서 들으리

혼자 기다리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리

, 내 어린 날의 바닷가 마을에 다시 태어난다면

수심을 헤엄쳐 바위 틈에 낀 성게를 줍는 해녀가 되리

봄 쑥을 캐고 생미역을 잘라 먹으며 웃는 날이 많으리

쉬는 날에는 문구점에 들러 색 볼펜을 고르고

책상에 앉아 밑줄을 그어 둘 문장을 찾으리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

먼 당신에게 편지를 쓰리

어릴 적 사투리를 고치지 않으리

친구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국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리

꿈에 속아 짐 가방을 싸는 일은 다시 없으리

나무캥거루와 쿠스쿠스의 서식지를 멀리서 그리워만 하리

 

사는 곳이 고향이 되는 법은 없었으므로

 

―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 2023

 

-----------------------

 

출국

 

채인숙

 

이제 가 보려구요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들키지 않으려구요

 

만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녕, 하는 말은 비행기를 닮았어요

날렵하고 매끄러운 금속 같아요

 

언제부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방방곡곡 병실에 누워

작별의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없는 동안에도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우리는 이미 다정한 비밀을 나누어 가졌어요

 

물로 닦으면 숨은 글자가 드러나는 옛날 문서처럼

그것은 나의 출입국증명서에 은밀히 기록됩니다

 

이제 비행기를 타려구요

낡고 지친 마음은 들키지 않으려구요

 

몇 권째인지 모를 푸른 여권을 들고

 

당신이 잠든 사이

나는 다녀오겠습니다

 

―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 2023

 

채인숙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에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채인숙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여름 가고 여름』, 민음사에서 발간 - 미디어 시in

리호 기자 2015년 오장환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문학 활동을 시작한 채인숙 시인이 등단한 지 8년 만에 첫 시집 『여름 가고 여름』(민음사, 2023)을 출간했다.채인숙 시집의 주 공간은 그가 거주

www.msiin.co.kr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