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오장환문학상, 김구용시문학상을 수상한 장이지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편지의 시대』를 창비시선으로 발간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편지’라는 그윽하고도 따스한 소재로 한층 깊고 다채로워진 서정의 세계를 선보인다. ‘편지의 시대’라는 제목에 값하듯 “모든 시를 편지로 읽어도 무방한” 이번 시집은 ‘편지’를 “장치가 아니라 아예 시의 형식으로”(장은영, 해설) 삼아, 편지에서 뻗어 나온 여러 갈래의 감상과 상상과 사유를 자유롭게 펼쳐 보인다.
불가능한 사랑과 상실감을 편지를 매개로 낭만적으로 노래하는 한편, ‘편지란 무엇인가’ ‘왜 편지를 쓰는가’와 같은 질문에 끈질기게 매달리며 편지를 인간의 존재 양식으로서 해석하려는 시도 또한 의미 있게 다가온다.
편지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수놓아진 이번 시집은 뉴미디어를 통한 즉각적인 연결과 단절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옛날 편지의 세계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진하게 깔린 세계, 수신을 곧바로 확신할 수 없는 간절함의 세계라는 특징을 갖는다. 그래서 연결을 갈망하고 낭만이 우세했던 세계, 즉 ‘편지의 시대’로 데려갈 수 있는 이번 시집이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시집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편지가 가득 쌓인 비밀스런 서랍장을 열어젖힌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눈앞에 쏟아진 편지들에는 이제 도저히 닿을 길 없는 ‘당신’을 향한 안타깝고 쓸쓸한 마음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였을 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모두 서로에게 전해졌”(「우주적」)지만, 더 이상 함께일 수 없는 지금, ‘당신’의 존재를 실감하고 ‘당신’의 마음을 가늠하기 위한 통로는 편지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을 쓸 수 없다면 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불타버린 편지」)라고 쓰라리게 말하며 “뒤늦은 사랑”(「먼 곳」)을 쓰고 또 쓴다. 하지만 답장을 받을 수 없는 상황도 있기에 편지 쓰기는 결국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감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사랑의 폐광」)가 된다.
이처럼, 수신에 대한 희망 없이 절실하게 계속되는 편지 쓰기는 그 애절함과 강렬함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따라서 독자들은 『편지의 시대』를 읽으면서 두 가지 체험을 만나게 된다. 편지를 쓰는 화자와 빙의되기도 하고, 편지를 받는 청자와 빙의되기도 하는 체험이 그것이다. 시집 『편지의 시대』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그런 빙의적 경험을 시적으로 자연스럽게 여러 번에 걸쳐 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슬픈 습관
장이지
당신은 내게 전화로 헤어지자고 말하고 그 후로 내게는 다른 방식의 이별을 상상하는 슬픈 습관이 생긴다 당신은 사막 가운데에서 헤어지자고 말하고 내 발밑에서는 이빨 돋은 모래 고기가 선회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어느새 빙산 위에서 헤어지자고 쓴 얼음 편지를 내게 건넨다 (매머드의 슬픈 사체) 사막에서도 극지에서도 당신은 처음에 우리가 만났던 때보다 어른스럽고 아름답다 당신은 내게 아무튼 편지 같은 것을 쓴다 그것은 어김없이 내 트레이싱지 같은 피부를 찌른다 폐부에 닿는다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사이에는 기항지가 없어요, 하고 중얼거려 본다 그러나, 그러나 편지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하늘의 새들이 모두 편지로 변해 추락한다) 우리의 시대 역시 그렇다 얼음 편지가 날아온다 모래의 눈물이 흐른다 편지를 펼치면 그것은 당신이라는 이름의 계단이 되고 편지의 젖은 부분이 깊어지면서 우물이 되고 늪이 되고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채를 쌓고 그 안에 갇히는 것은 누구 탓일까 꿈에서 당신은 언제나 실제의 당신보다 운명적이고, 그러나 편지의 시대는 이미……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 『편지의 시대』, 창비, 2023.
-------------
반복
장이지
연출 선생이 배역을 정하는 데 골몰한다 모두 폴이기를 바라지만 폴은 한 명이다 나는 폴이다가 니나가 된다 니나는 미륵이 되고 미륵은 폴이 된다 아침에 쫓는 사람이다가 저녁에 쫓기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편지는 오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편지가 온다 나는 연출가가 된다 모두 폴이 되려 하니 큰일이다 극단 대표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통보한다 거울 안에서 스핑크스는 부은 발을 주무른다 나는 극단 대표가 되어 연극을 본다 무대 위에서 랭보가 말한다 나는 타자다! 중요한 것은 그뿐이다 나는 타자다, 이 말이 누구의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내뱉는다 소년에게 그 말을 해준 것이 바로 나일까 모든 배역을 거치려고 한없이 돌아오는 윤회, 모든 사람이 되려고 한없이 돌아오는 나, kryptonite 아침에 일어나면 까닭 없이 슬프다 무엇을 잃었는지 잘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는 되찾은 자가 되리라 편지가 오리라
― 『편지의 시대』, 창비, 2023.
-------------
기대
장이지
당신의 편지가 오네 오고 있네 내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당신의 혀가 내 귓불에 닿고 당신의 부드러운 혀가 내 귀 안에 이미 있네 당신의 편지는 오고 있네 오네 동구 밖까지 왔을까 잡화점 앞을 무사히 지났을까 라플란드의 집배원이 커다란 가방에서 당신 편지를 찾아 초록색 지붕의 집 귀에 넣어둘 것이네 오, 나는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야지 소리 높여 읽어야지 그러면 이미, 내 귀 안에 있는 당신의 혀, 당신 혀의 무수한 미뢰들, 하나하나 벙그는 말의 꽃봉오리들
― 『편지의 시대』, 창비, 2023.
-----------
허물
장이지
한 번도 편지를 불태워 보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새까만 어둠으로 앉은 남자가 방금 몸살을 하며 빠져나온 추문(醜聞)의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자기의 허물을 몰래 불태우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습니다
― 『편지의 시대』, 창비, 2023.
장이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시선으로 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2002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데뷔한 한승태 시인, 『고독한 자의 공동체』(걷는사람, 2023) 출간. (1) | 2024.01.30 |
---|---|
황형철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날 밤 물병자리』 시인의일요일시인선으로 발간 (1) | 2024.01.29 |
김양희 시인의 두 번째 시조집 『제라하게』 작가기획시선으로 발간 (1) | 2024.01.28 |
김현장 시인의 첫 번째 시조집 『느루』 열린시학 정형시집으로 발간 (1) | 2024.01.22 |
11년 만에 신작 시집 『하염없이 하염없는』으로 돌아온 강연호 시인 (1) | 2024.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