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개의 얼굴로 사는 걸까
김영주
늦은 저녁 귀갓길 승강기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뒤에 숨은 인기척을 느낀다
마주한 두 거울 사이에
서있는 나 가짜 같다
오른쪽 거울 속 거울, 그 거울 속 거울에도
왼쪽 거울 속 거울, 그 거울 속 거울에도
복제된 유전자처럼 무한대의 나 나 나…
한순간 아득하다 깨닫지 못하고 산
몇 개의 허상으로 나 살고 있는 걸까
생각은 또 몇이나 될까
나도 내가 궁금하다
―『다정한 무관심』, 현대시학사, 2023.
--------------------------
우리는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주체는 귀갓길 승강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진짜 내 모습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진짜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수많은 거울 속에서 무수한 페르소나persona가 무한대로 계속 복제되고 확장되어 나간다. 주체는 거울 속에 진짜 ‘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진짜 ‘나’를 인지하고 각성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참나’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짜 나’는 무한하고 영원한 신성神性의 존재라서 인식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참나’를 인식하기는 어려우나, 결코 ‘진정한 나’를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바닷속 물고기가 사막 위를 거닐며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는 꿈을 꿀 수는 있으나, 엄연히 물고기가 바닷속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물고기가 사막 위를 거닐며 물을 찾는 꿈을 실제라고 믿듯이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나’라고 믿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업보Karma에 충실할 수 있다.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유한하고 일시적인 허상虛像이라서, 외부적인 현상만을 인식하며 본질(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실상 자신의 모습은 양파처럼 다양한 가면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양파 껍질을 까도 까도 속내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럼, 주체는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서 진짜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여러 개로 분열된 ‘나’는 다양한 가면 속에서 고유의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여러 페르소나가 진짜 ‘나’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색깔과 모양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를 자신의 전부 혹은 실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느 특정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나의 모든 페르소나를 부정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그 하나하나의 페르소나를 전부 ‘나’의 한 부분이라고 인식하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는 유한하고 일시적인 현상계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각성할 수 있다는 견고한 논리에 갇혀, 오히려 진정한 자신을 망각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무수한 꿈과 생각을 일으키는 ‘순수 의식Pure Consciousness’ 자체가 ‘나’인데, 순수 의식은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나’를 인지하기 어렵다. ‘나’라는 순수 의식을 온전하게 외연外延으로 확장하거나 통합하지 못하니 이런 궁금증이 동원되는 것이 아닐까. 페르소나는 ‘나’의 본질이라 말할 수 없지만 ‘나’의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어떤 면에서 이 시는 하나의 자아로 통섭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분열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역할을 잘 수행해야 잘 살 수 있다는 현대인들의 강박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 그 자체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어떤 역할을 해냈을 때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흔한 착각이다.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피하다. 사회적 역할이 크고 다양하기 때문인데, 자신이 쓴 가면에 대해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가면을 쓰며 살아가는 것을 회의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양한 ‘나’를 갖춰 갈 때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대명사들』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4 _ 김영주의 「나는 몇 개의 얼굴로 사는 걸까」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4 _ 공화순의 「와이파이 유목민」 (4) | 2024.10.22 |
---|---|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24 _ 이토록의 「산수국 헛꽃이 푸르게 지듯」 (0) | 2024.09.21 |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3 _ 김수환의 「공터가 많아서」 (0) | 2024.08.22 |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23 _ 임성구의 「왔다 그냥 갑니다」 (0) | 2024.08.07 |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3 _ 한혜영의 「자연에서 배우다」 (0) | 2024.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