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린 기자
2017년 『시와 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이영숙 평론가가 첫 번째 평론집 『야만의 시대기』를 푸른사상사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미 1991년에 『문학예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하여 시집 『시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를 발간한 바가 있다. 시와 평론을 동시에 쓰는 작가로서 그의 안목이 평론에서 어떻게 적용됐는지 궁금증이 유발된다.
그가 『야만의 시대기』에서 주목한 테마는 야만성이다. 야만에 빠져버린 이 시대에 문학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평론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텍스트의 내밀한 언어를 파악하는 동시에 그것을 바깥의 대상들과 연결시켜 주는 게 평론의 본분 중 하나라고 여기고 정밀한 작품 분석과 치밀한 문장을 통해 그것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제1부에서는 공간의 구조화된 방위를 사용하는 방식이 시적으로 달리 구현되는 지점 등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제2부에는 이 책의 중심 주제로서 ‘야만’에 근접한 글들이 실렸다. 일테면, 과거의 동지와 현재의 동료를 적으로 만들어 부를 창출하는 게 정치가 된 현실에서 오로지 나만이 나의 진정한 동지가 되는 세계의 도래를 우리는 목도한다.
제3부에는 문학이 미추를 길어 올릴 때 현실은 도덕을 외재화하며, 문학이 세속에서 신화의 시간대를 지향할 때 현실은 신화를 세속의 시간대로 끌어내리는 현상 등을 다룬다. 문학이 ‘바깥의 대상’과 연결되려는 지점들이 그것이다. 제4부는 아우라와 이미지, 기원과 원본 등 시의 발화점을 드러내는 글이 수록되어 읽을거리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이영숙 평론가는 ‘책 머리에서’ “세계의 폭력성을 시적 문체가 완화하고 무마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이 글은 다만 해석의 윤곽을 제시할 뿐, 시들이 내뿜는 시적 에너지의 모든 결을 포획하지는 못한다. 시가 지닌 긴장감과 침묵의 행간을 감각적이며 비유적인 방식으로 공명시키고 싶어 시적 문체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언술했다. 겸손한 고백이다. 어려운 용어가 잔뜩 들어간 평론집보다, 평론가들만 읽는 평론집 보다, 아니 평론가들조차 읽지 않는 평론집 보다, 이 책에 실린 평론들은 충분히 말하고자 하는 대상과 텍스트를 직관하고 통찰해서 이영숙만의 언어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태생적으로 야만이 되기 쉬운 구조를 가진 문명이 야만과 동의어가 된다면, 역설적으로 야만의 시대는 ‘진화된 문명’의 시대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야만’의 반영뿐만 아니라 ‘진화된 문명’을 위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까지 이영숙 평론가는 『야만의 시대기』에서 암시한다.

< 책 속 구절 맛보기 >
안과 밖, 주체와 타자, 긍정과 부정 혹은 부정의 부정, 이성과 감성 등의 경계는 무너짐으로써 대립적 개념들을 유통시키는가, 무화됨으로써 가치의 전도를 촉발하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전복시킴으로써 서로를 전복하는 모험을 감행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들일까.(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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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사고와 추론을 위한 인간의 기억 과정은 그 중 의미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대뇌에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인간은 집중과 탐구를 통해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결과물은 지식과 지혜의 형태로 생산자의 내부에 축적되거나 지적 소비자와 공유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지성을 확산시켜 왔다. 학문, 과학, 예술 등의 영역으로 체계화되고 개념화되고 미시적으로 분류되는 가운데, 과거에 대한 주석과 현재에 대한 해명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상상력을 빌려 글로 표현된 형태를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른다.(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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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현재적이지만, 현재 너머를 내다보거나 현재 이전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미래로도, 과거로도 뻗는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시인도 현재-현재-현재를 쓸 뿐이다. 왜 그런가. 정지용의 「향수」나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 각각 과거와 미래를 시 속에 아로새겼다 하더라도 고향과 조국 상실이라는 당대적 상황이 결여하고 있는 요소를 희구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된 현재가 곧 역사이므로 현재는 늘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모든 현재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며, 유의미한 현재만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산증인이란 당대를 사는 일반 모두가 아니라 유의미한 현장성을 확보한 개인, 혹은 집단일 수밖에 없다. 유의미한 사건을 선택하고, 거기에 개념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류에 의해 강자 중심의 역사 기술이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그 여파가 국민 대다수에 전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경우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전쟁의 참화를 겪었던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았다.(144~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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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현실의 차이점은 전자가 극점으로 치달을 때 후자는 일정 시점에서 멈춘다는 점이다. 전자가 승화, 아니면 파국으로 이행할 때 후자는 타협의 지점을 갖는다. 전자가 이드(Id)나 슈퍼에고(Super Ego)의 면목을 보여줄 때 후자는 대체로 에고(Ego)의 현실감각을 작동시킨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문학이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 현실은 그것을 은폐한다. 문학이 미추를 길어 올릴 때 현실은 도덕을 외재화한다. 문학이 세속에서 신화의 시간대를 지향할 때 현실은 신화를 세속의 시간대로 끌어내리려 한다. 세속과 신화 사이에서 길항하며 약속이나 사랑도 그 어느 쪽인가로 당겨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적 상황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을 반영하긴 해도 가공되고 객관화된 지적 공간이다. 그렇다고 하여 시적 상황이 비현실이라는 얘기도 아니다. 시는 정처 없지만, 닻을 내릴 자신의 항구를 갖고 있다.(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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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우라를 살리는 것이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아우라를 말한다. 시에서 그것은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나기도 하고 이면에서 우러나와 우리의 내면에 자리하기도 하며, 감각적으로 몸에 아로새겨지기도 한다. 이미지로, 전율로, 빛과 어둠으로 혹은 침묵의 형태로 말하고, 삶에 녹아들어 나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도무지 실체가 없는 아우라는, 그러나 현전한다.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로. 곧 쾌와 감동을 부여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서뿐 아니라 텍스트가 품은 질문에 답하는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라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시가 자신의 욕망과 존재들의 욕망에 에워싸일 때 아우라는 빛을 발한다. 아우라는 현전(現傳)하지 않고 현전(現前)한다. (305쪽)
야만에 빠져버린 시대에 문학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묻는 문장들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야만에 빠져버린 시대에 문학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묻는 문장들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2017년 『시와 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이영숙 평론가가 첫 번째 평론집 『야만의 시대기』를 푸른사상사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미 1991년에 『문학예술』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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