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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실존적 경험을 통해 주어진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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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5. 10. 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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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작약과 공터를 문학과지성시인선으로 발간

 

 

하린 기자

 

1991현대시세계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발간하며, 날카롭고 세련된 감수성과 짙은 여운을 남기는 파격적인 문체로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허연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작약과 공터를 문학과지성시인선으로 발간했다.

 

시인은 2025년 올해, “시대적 징후로서 나타나는 젊은 날의 상처와 불안 속에서 시적 연륜을 쌓아가면서도 끝내 바깥에 선 아웃사이더의 냉소적 시선을 놓지 않는 시적 일관성”(심사위원 오형엽·박혜진·양순모·김언)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26회 현대시작품상을, “아름답고 경이로우면서도 슬픈 서정”(심사위원 이근배·나태주·신달자·이재무·홍용희)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37회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두 상의 수상작이 모두작약과 공터. 이는작약과 공터가 작품성 면에서 탁월함이 입증된 셈이다.

 

우리는 1995년 수많은 문청들을 사로잡았던 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민음사, 2014; 세계사, 1995)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첫 시집 발간 이후 13년 동안 긴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다 2008년 그가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을 펴내며 다시금 허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세상을 향해 식지 않은 반항의 열기와 냉소적이지만 연민 어린 시선이 담긴 작품으로 그를 간절히 기다리던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 세속 도시를 거니는 니힐리스트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자유를 향한 뜨거운 갈망을 드러낸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차례로 선보이며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시인은 여섯 번째 시집인 작약과 공터에 이르러 시의 여음(餘音)이 진동하는 고요한 공터에 홀로 선 채 생의 비극에 온몸으로 맞서는 투지를 다진다. “보호색처럼 온몸을 슬픔의 색으로 무장하고 기꺼이 슬픔의 한가운데를 향해 섞여 들어가려는 어떤 결심”(시인 유선혜)으로, 전쟁 같은 삶에 놓인 시린 풍경을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기록한 총 66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묶었다.

 

허연의 시에서 슬픔과 고독, 그로 인한 통증은 필연적이다. 화자에게 삶이란 마치 죽음의 바탕과도 같아서, 약간의 장력으로도 휘말려 들어가는 넝마처럼 어둠에 근접해 있다. 사랑은 버림으로, 솟구침은 가라앉음으로, 욕망은 절망으로 귀결된다. 거기엔 마땅한 계기가 없다. 눈뜬 직후 육체를 파고드는 세상의 빛과 형상이 주는 피로감이며, 그 느낌은 막연한 가능성에 존재를 매달리게 해 삶을 짓누른다. 그리고 이것은 허연이라는 한 개인의 숙명이자 시인으로서 그가 갖춘 생래적인 감각이다. 그리하여 허연 시의 화자는 나쁜 계절과 나빠질 계절만을 겪어왔으나 오로지 자신만이 버틸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낸다

 

그 구역에 기꺼이 초대된 독자들은 지극한 실존적 경험을 통해 주어진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는 허연 만의 감각을 맛보게 될 것이다. 단언컨대 허연 시인의 시집은 독자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가 구축한 시 세계와 시적 아우라가 수많은 독자들의 감각과 감성을 깨우고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여실히 이어진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작약과 공터

 

허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빗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아이의 허기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작약은 

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 버리는 고요 때문에 

 

작약과 나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놓았다 

 

작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었다

―『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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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서 숨을 때는 빗속에 숨는 거야

 

허연

 

작고 붉은 열매들을 떨어뜨렸다 

죽음이었다

 

우리는 노인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다행히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열매들은

비가 잠시 그친 사이

재활용 더미 속에서

포자로 피어났다

힘은 없지만

난생처음 뭔가가 된 것이다

 

장마 덕분이었다

 

장마철

이 계절엔 모든 게 어렵다라고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계절 나는 

다시 한번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딜 것이다 

포자처럼

 

슬퍼서 숨을 때는 빗속에 숨는 거야

 

빵칼을 들고 세상에 덤비는 심정으로 

빗속에 서 있었다

―『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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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감

 

허연

 

나도 나방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 

궁금했으니까

 

고통 속에서 하는 짓만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점차 나빠지는 이야기

 

난 몇 가지 종류의 계절을 경험한다 

나쁜 계절과 나빠질 계절

 

상처 수집가들이 급할 건 없다

 

지구의 축은 이미 기울어져 있으니까 

올 것은 반드시 오고 

죽을 것은 반드시 죽는다

 

나는 통증에 시달리며 이 구역의 계절을 만든다

 

슬픔에도 기술이 있다

다 죽고 나면 계절은 성당이 된다

 

새로 내리는 비는 

슬픈 챔피언들을 불러모은다

 

이 계절에는

속된 세상을 지는 나무들이 있었다

―『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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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화살

시작법(詩作法)

 

허연

 

당대의 모든 성분들을 

찬 바다에 던지는 일

 

아픔으로 알게 된 사실은 

남에게다 말할 수가 없으니까

병은 철저히 내 것이니까

 

틈이나 경계 이런 데서 살다가

가끔씩 처벌받고

인간에게 소리 지르다가 

강물로부터 대답을 듣고

 

최후에 온 자들과

세계의 마지막을 반칙으로 만드는 일

 

매번 깨닫지만

고백은 고백 속에서만 존재하고 

계속 고백하는 자로 남는 것

 

말 안에 있지만 동시에 바깥에 있는 

총알도 파고들지 못하는 

딱딱한 씨앗 속에서 꾸미는 흉계 

 

설명 없이 

목적지를 파괴하고 

파괴된 과녁을 향해 

쓸데없는 화살을 날리는 일 

 

같아지지 않되 

녹아드는 일 

 

죽어가는 떠돌이 개의 눈에서 번개를 만나는 일

―『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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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실존적 경험을 통해 주어진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는 감각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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