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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용 메스처럼 예리하게, 정밀하게 죽음을 감각적으로 해부한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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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5. 11. 1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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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개안수술집도록을 민음사시인선으로 출간

 

 

하린 기자

 

1992작가세계로 등단해 박인환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이상시문학상을 수상한 함기석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개안수술집도록을 민음사시인선으로 발간했다.

 

함기석은 수학적 개념, 추상적 기표, 기하학적 이미지를 비롯해 탈언어적 언어와 전위적 형식으로 초현실적 시 세계를 만들고 갱신해 온 독보적인 시인이다. 2020년 여섯 번째 시집 디자인하우스 센텐스를 통해 움직이는 좌표 위에 지은 무한 공간 속에서 추상적 기호로서의 죽음을 펼쳐 보여 주었다. 그런 후 시집 음시』 『모든 꽃은 예언이다부터는 현실의 구체적인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무한 속에 유한을, 추상적 시공간 속에 물질적 실재의 사건인 죽음을 새기려는 시도였다.

 

그 새로운 시적 실험은 이번 시집 개안수술집도록에서 정점에 이른다. ‘죽음은 시간과 장소, 주체를 특정하는 물질적 사건이다. 시인은 개안수술집도록을 통해 이 무수한 죽음들을 무한 공간에 기록하려 한다. 하나의 죽음을 한 편의 시로, 부동의 좌표점으로 각인시킨다. 시인은 무수한 점들을 선으로 이으며 질문한다. 소멸해 사라질 물질인 우리, ‘우리와 함께 사라질 무형의 정념들이 시를 통해 무한 속으로 자리바꿈할 수 있는지. , 죽음 안에서 죽음을 돌이킬 수 있는지 시적 질문과 시적 대답을 이어간다.

 

개안수술집도록엔 제목이 모두 같은 시 개안수술집도록’ 53편이 부검대 위의 사체처럼 놓여 있다. 하나의 시마다 하나의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의 이전과 이후를 보여 주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의 제목은 부검 보고서가 아닌 개안수술집도록(開眼手術執刀錄)’이다. 말 그대로 눈을 열기 위한 수술의 기록이다. 즉 죽음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체는, 우리는 눈을 뜰 수 있을까? 눈을 뜬 후에는 무엇을 보게 될까? 시인은 어떤 연역도 가설도 없이 오직 눈앞에 놓인 단서를 따라가는 귀납의 방식으로, 죽음의 근원과 소생의 근거를 추적하며 이 실험을 완수한다.

 

조재룡 문학평론가는 추천사를 통해 함기석의 시는 어둠에 잠기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만 얻어 낼 수 있는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그는 차가운 절제 속에 뜨거운 절규를 품는다.” “시는, 더는 위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고통을 집도하는 날카로운 메스가 된다. 이 단단하고 날카로운 언어의 메스를 쥐고서 시인은 묻는다. 존재는, 사물은, 죽음은, 언어는, 아니 나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라고 말하며, 절제와 깊이와 감각적 언어가 지향하는 세계관을 피력했다.

 

함기석은 시집을 낼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펼쳤다. 개안수술집도록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본질성을 함기석만의 시선으로 새롭게 탐구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함기석이라는,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가능성을 다음 시집에서 기대하게 된다. 우리 시단엔 함기석이라는 독창적인 장르가 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開眼手術執刀錄

執刀 第25

함기석

 

이 시는 첫 문장부터 곰팡이가 피어 있다 청주시다 산남동 법원 정문에 곰팡이 핀 노부부가 목발을 짚고 서 있다 눈도 코도 입도 모두 곰팡이 핀 어휘들이다 허공을 떠도는 찬 눈발처럼 이 시는 상징도 은유도 없다 얼굴이 없다 청주시다 이 시에서 나는 폐허가 된 말의 유적지를 떠도는 먼지이고 제거된 마침표다 소송을 소송할 수 없고 심판을 심판할 수 없는 검은 입술이다 도로엔 찢어진 법전이 뒹굴고 힘없는 날벌레들의 주검만 자동차 바큇자국에 짓눌려 있다 찢어진 하늘에 꽃눈이 흩날리고 뱀처럼 바닥을 사는 자들의 메마른 몸과 침묵 들, 누가 또 불길한 징역을 선고 받고 말을 잃는다 곰팡이 핀 내 시의 음부처럼, 법원 울타리 따라 울음들이 노란 개나리 꽃빛으로 은폐되고 있다 노부부의 울음이 4월의 눈발처럼 흩날리는 도시다 이 시는 마지막 문장까지 곰팡이로 덮여 있다

―『개안수술집도록, 민음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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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眼手術執刀錄

執刀 第38

 

함기석

 

붉은 배가 침몰해 있다 나의 입속에, 낮 동안 품었던 분노는 저녁의 음울한 파도 빛깔이다 두 입술은 등 돌리고 잠든 알몸의 노부부, 등뼈 사이로 해안선이 길게 이어져 있다 흑갈색 갈기의 말 적막이 혼자 걷고 있다 발자국마다 흰 물거품들 노을에 반짝이고 빈 병과 죽지 않는 스티로폼, 가방과 속옷이 널브러져 있다 벼랑은 백사장 끝에 유서 휘갈긴 병풍처럼 서 있고 낮게 출렁이는 수평선, 출입 금지 구역에서 중음신(中陰身) 아이 둘이 깔깔거리며 손으로 모래 무덤 만들며 놀고 있다 참살된 배를 품은 바다의 턱을 쓰다듬는 소금 바람, 여기는 산 사람도 눈을 잃고 말을 잃은 통곡의 땅, 팽목이다 물찬 폐처럼 출렁이는 구름아, 네 눈엔 보이니? 바다에 닿은 땅의 가파른 둔부가 흘리는 인간의 정혈(精血), 들리니? 해저에서 울리는 아기고래들의 아리랑 허밍, 산 자의 죽은 입과 죽은 자의 죽지 않는 귀를 드나드는 파도, 물새 울음, ()의 비린 음들

―『개안수술집도록, 민음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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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眼手術執刀錄

執刀 第(-)23

 

함기석

 

눈은 병을 명상 중인 암실, 인간의 골육 수도원 쌍둥이 봉분이다 수정체와 망각 사이 꿈꾸는 유리체 어항이다 내가 잠든 사이 누가 내 안방(眼房)을 파도치는 공중과 구름 낀 심해에 각각 옮겨 놓았을까 국가는 왜 눈을 밀매하는 집단일까 국가는 왜 가난한 시인들의 말과 꿈조차 밀매하는 걸까 수면 중 나의 뇌수 밑 해저터널이 터지자 떠오르는 배 떠오르는 비밀 떠오르는 익사자들, 유령 빛이 물속을 떠도는 봄이다 4월이다 주룩주룩 노란 흙비가 내리고 수면으로 떠오르는 옷가지들 가방들 봉인된 울음들, 나는 더 깊게 잠들어 더 깊게 눈을 뜬다 실명한 눈을 뜬다 하늘도 땅도 마이너스 재배치되는 음모의 시대다 신()공포시대다 밤의 해안도로 따라 벌거벗은 아이들이 비명하며 달리고 백발의 숲 지붕 위로 눈먼 시계들이 제비처럼 난다 저 멀리 해안 절벽 국립 병원 십자가엔 낮달이 걸려 나팔꽃 치마처럼 펄럭이고

―『개안수술집도록, 민음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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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眼手術執刀錄

執刀 第(-)29

 

함기석

 

햇빛 속을 고양이가 걷는다 발소리도 없이 방금 물에서 나온 해녀 해랑이 구좌읍 하도리 검은 돌담길을 철퍽철퍽 걷자 그림자처럼 고양이가 따라 걷는다 숨소리도 없이 수평선은 길게 누워 명상에 든 시신처럼 배꼽 위에 구름배 한 척 올려놓고 고양이는 천천히 따라 걷는다 전복 따던 빗창과 골갱이를 얹어 놓은 돌담 너머 저쪽, 194812월 그날 동틀 무렵 어멍 아방 다 잃고 고아가 된 여섯 살 소녀 해랑, 저녁 햇빛 속을 고양이가 걷는다 빛, , 눈 시린 길을 걸으며 빛, , 발 시린 기억의 돌담길 집을 떠올리는 고양이는 그날 해랑의 오라방 대신 대살(代殺)된 어멍의 혼백, 물질 끝나고 해랑이 집에 돌아갈 때마다 따라 걷는다 호이호이 숨비 소리 몰아쉬는 바다를 끌고 쨍그랑 하늘 깨지는 그날의 무서운 총소리를 생생히 들으며 70년 동안

―『개안수술집도록, 민음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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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용 메스처럼 예리하게, 정밀하게 죽음을 감각적으로 해부한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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