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린 기자
2021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필립의 첫 시집 『밤새 여진이 있었어』가 타이피스트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등단 당시 “붕괴하거나 금세 사라져 버리는 세계에 대한 불안의 정동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최필립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끊임없는 재구성, 과거와의 끈질긴 연결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진동하는 감각적 세계를 펼쳐나간다.
그러한 특성을 감지한 이현호 시인은 추천글을 통해 “최필립의 시는 균열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세계를 보여준다. 부서지고 흩어지는 언어로 전에 없던 탑을 쌓고는, 곧 허물어뜨린다.” “그의 시는 균열하여 허물어짐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을 붙잡는다. 낯설게 파편화한 이미지는 삶의 투명한 층위를 드러내고, 상처는 미학이 아닌 물성으로 다가온다.”라고 평했다.
『밤새 여진이 있었어』는 감정의 파편과 현실의 균열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시집이다. 한 번의 진동으로 끝나지 않는 감정, 말해지지 않은 잔향, 부서진 세계의 조용한 떨림이 그의 시 안에서 여진처럼 이어진다. 그 진동은 절망의 복기이자 희망의 변주이며, 감정의 기록이자 감각의 사전이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진동’의 감각은 결국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로 작동할 것이다.
최필립의 시집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지점은 음악성이다. “음악의 3요소는 에코와 필과 소울이라고 생각한”(‘시인의 말’) 시인은 시집 속에서 독특한 리듬감을 구사한다. “풀피리 필릴리립”(「아스키 연애」)처럼 의성어를 실험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베버리지, 베버리지”(「바구니 가득 증류하는」)처럼 단어를 리듬처럼 반복하며 음악을 창조한다. 재즈의 즉흥성과 클래식의 구조미, 노이즈의 실험성이 어우러진 최필립의 시는 ‘최필립’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울리게 한다. 이 음악성 또한 최필립이란 시인의 개성적 측면을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집 속 시 맛보기>
그건 어떤 의미였고
최필립
떠난 연인과 밥을 먹는다. 밥알의 질감이 상해 있다. 씹은 형태 그대로 뱉으면 심정지. 살짝 열린 문 사이로 투명 한 빛이 내려앉는다. 카메라의 시선은 질그릇의 윤곽을 따라간다. 흰 밥알이 차례대로 렌즈에 들러붙는다. 창밖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흐르는 풍경 속에서 나는 잠시 연인의 실루엣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릇이 추락한다. 깨진 물은 온통 하얗다. 연인이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 준다. 역무원이 다가와 애정 행각을 멈추라고 제재한다. 짐짓 억울한 표정 으로 우리의 행위는 소생술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기차는 절벽을 향해 돌진한다. 실패하는 원추가 계산할 수 없는 속도로 우리를 덮친다. 절벽을 움켜쥐던 실밥이 터진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너는 가위로 김치를 자르고, 빈말처럼 찻물을 우리고, 깨진 바위의 부스러기를 대신 덮어쓰고, 너는 고유한 작가의 이름을 지니는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리지 않는구나. 나 혼자 모르는 기차역에 내렸다. 입술이 입가를 떠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밤새 여진이 있었어』, 타이피스트시인선,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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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여진이 있었어
최필립
밤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여긴 섬이고 우리뿐이야 영원히 눈을 감지 않아도 돼 모든 믿음이 상실되는 시간 다이아몬드들이 하늘에서 춤을 추고 장난감 병정이 하나둘 문을 열고 들어오면 하다가도 손을 흔들어 줘야 해 침잠하는 불빛을 손에 그러쥘 수 있어야 해 만조와 간조 를 반반씩 섞어 칵테일을 만들어 줘 한숨에 들이켜 버리자 질식할 것처럼 가장 무책임한 표정을 지으며 붙잡히자 (우리 가장 멋진 장난을 치자) 나는 보니 너는 클라이드 포위된 밤들이 한순간에 지나가면 트렁크에서 훔친 것들이 쏟아지고 가령 너의 차가운 눈빛이나 장티푸스에 걸려 죽은 나의 영혼 같은 것들 밤새 여진이 있었어 너는 못 들었겠지 여긴 우리뿐이니까 몸에 가득한 주저흔은 칼날이 흔들린 만큼 남아 있고 영원히 집에 갇힌 사람들이 울부짖고 저 중 에 우리가 낳고 기른 아이도 있을까 물에 빠진 그림자를 주워 베인 곳에 밴드처럼 덧댔을까 야자수 너머로 유성우가 쏟아지고 있어 이게 마지막이야 마지막 도둑질이야 네 심장을 훔쳐서 똑딱 시계로 만들 거야 두근대다가 총알이 파바박 떨어져 나오겠지 포위된 밤은 영원히 포위된 상태로 유일하게 우리의 것이 아닌 채로
―『밤새 여진이 있었어』, 타이피스트시인선,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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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멋져
최필립
당신이 누군지 나도 몰라 당신도 몰라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몰라 그러나 이 말 한마디 난 할 수 있지 당신은 멋져 나는 당신과 춤을 출 수도 있고 별안간 연심을 품을 수 있고 그러다 당신과 모종의 계약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당신은 정말 정말 멋져 유흥가에 빛나는 네온사인 홀린 듯 주춤거리며 들어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당신, 당신의 애인 당신은 나를 처음 봤지만 바람을 피던 그이와 내가 닮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술기운에 내가 멋져 보였는지는 몰라도 얼굴을 잔뜩 붉혔지 애인은 나를 의심했고 나도 그를 의심했고 하지만 당신만큼은 의심하지 아니하였고 사람에게 기대해도 될까 사람에게 기대기 시작해도 됩니까 나는 당신의 애인과 주먹다짐을 하는데 당신은 맑은 안색으로 옆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지 풀피리 흥얼거리며 술병이 날아가고 피가 흥건하고 그런 유혈극 속에서 당신은 동요하지 않네 어떤 동요도 부를 수 있네 이 유흥가에 동요를 들을 아이는 없지만 당신의 뱃속*에 있을 수 있고 그러나 우리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 어떤 태세도 갖추고 있지 않았어 결국 피 튀기는 육박전 끝나는 깨진 유리 조각으로 당신의 애인을 살해하고 당신이 내게 속삭였지 당신은 멋져 우리는 오늘 밤 한 명을 죽였으니 두 명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요 다음엔 가장 무고한 살해를 해봐요 나는 당신에게 어떤 도의적 기대도 하지 않고 우리는 이제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당신도 나도 다음 사람을 찾아도 될까 서로의 품속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꿈 깨며 산산이 조각나는 유리병 나는 껍데기만 남은 몸으로 당신을 더듬었고 얼굴 붉히며 나를 끝내 외면하는 당신 펌프질하는 내출혈 나는 꺼져 가는 숨으로 헐떡이며 읊조렸네 “당신은 멋 져......” 뒤도 돌아보지 않는 당신
*‘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밤새 여진이 있었어』, 타이피스트시인선,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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