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정혜숙
차 씨 별장 딸기밭에서 화약 냄새 맡았어요
아카시아 꽃이 지고 장미꽃 붉던 무렵
멀리서 가까이에서 화급하던 전언들
높낮이 없는 톤으로 표정 없는 얼굴로
그날을 기억하는 상흔 아직 검붉어요
선명한 5월의 문장紋章 삭제할 수 없어요
그때 그 이야기는 멀찍이 놓아둔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꽃들은 피고 지고
여전히 기차는 달려요
극락강 건너 칙칙폭폭
―『거긴 여기서 멀다』, 책만드는집, 2022.
-
달력의 숫자가 매년 5월을 가리키지만, 광주에게 이 시기는 순탄하게 흘러가는 계절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감각이자, 어떤 연대기적 서사로도 포섭할 수 없는 웅성거림이다. 정혜숙의 시 ‘그날’은 이처럼 닫히지 않은 문이자 마침표를 찍지 못한 문장으로서의 광주를 비집고 들어가, 5·18이라는 역사를 거창한 담론이 아닌 일상의 틈새에 박힌 구체적인 감각으로 복원한다. 시는 ‘딸기밭’과 ‘장미꽃’으로 대변되는 평화로운 풍경 속에 ‘화약 냄새’와 ‘화급한 전언’이 침투했던 그날을 냉철하게 기록하며, 박제된 기억이 아닌 현재형의 고통을 우리 피부 위에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시의 중심에는 씻어낼 수 없는 검붉은 ‘상흔’이 자리한다. 화자는 ‘높낮이 없는 톤’과 ‘표정 없는 얼굴’로 감정을 절제하지만, 내면의 기억은 이미 ‘5월의 문장(紋章)’이라는 고통의 기록이자 사회적 낙인으로 고착되어 있다. 시인은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대신 비명과 침묵 사이의 미세한 파동에 집중하며,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기어이 문장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기억의 실체를 붙잡는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역설적으로 비극의 실상을 더욱 또렷하게 각인시키며, 슬픔은 단순한 전염이 아니라 공유되는 것임을, 그리고 그 공유된 슬픔만이 굳어버린 상처를 녹일 수 있음을 묵묵히 증명한다.
시인은 ‘꽃들은 피고 지고’ ‘기차는 달리는’ 풍경을 통해 비극 이후에도 무심히 흐르는 시간의 비정함을 응시한다.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와 멈춰 서 있는 내면의 기억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며, 극락강을 건너는 기차 소리는 비극의 현장을 가로지르면서도 멈추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이 시가 가리키는 곳은 비극의 심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심연을 딛고 서서 서로의 손을 잡는 풍경이다. 5월의 광주가 계절로 편입되지 못한 채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렇게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함으로써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정한 봄의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이송희)

이송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대명사들』,『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 고산문학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9 _ 정혜숙의 「그날」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9 _ 정혜숙의 「그날」 - 미디어 시in
그날 정혜숙 차 씨 별장 딸기밭에서 화약 냄새 맡았어요아카시아 꽃이 지고 장미꽃 붉던 무렵멀리서 가까이에서 화급하던 전언들 높낮이 없는 톤으로 표정 없는 얼굴로그날을 기억하는 상흔 아
www.msiin.co.kr
|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39 _ 김일연의 「사랑의 언어」 (0) | 2026.05.24 |
|---|---|
|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 39 _ 김일연의 「향긋한」 (0) | 2026.04.29 |
|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38 _ 박정호의 「돌의 시간―한재골에서」 (0) | 2026.03.30 |
|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 38 _ 이기라의 「난동暖冬」 (0) | 2026.03.17 |
|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38 _ 한희정의 「관계의 역류」 (1) | 2026.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