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언어
김일연
침묵의 끝 간 데 어딘지 알 수 없는
너의 언어는 늘 말없음표를 거느린다
슬픔의 폐사지에서 네 침묵을 듣는다
마침표를 찾아서 더듬는 그 문장은
쉼표에서 쉼표로 끝없이 이어진다
내 아는 가장 긴 만연체 생애에 읽을 수 없다
―『향긋한』, 동학사,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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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늘 과잉이거나 결핍된 채 우리를 찾아온다. 이를 메우려 무수한 단어를 발명해왔지만, 마음의 깊숙한 곳은 언제나 바깥에 머문다. 김일연 시인의 시 「사랑의 언어」는 언표가 기능을 잃고 파산한 자리에서 시작되는 기묘한 소통을 응시한다. 시인은 사랑을 매끄러운 수사가 아니라 해독되지 않는 침묵과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 부호의 연쇄로 그려내며, 이면에 놓인 존재론적 고독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시에서 언어는 밖으로 터지지 못하고 안에서 맴돈다. “말없음표를 거느린다”라는 대목은 발화의 지체를 집약한다. 말없음표는 끝내 건너오지 못한 감정의 잔류이며, 입술 언저리에서 맴돌다 짓물러버린 내면의 앙금이다. 이로써 사랑은 전달의 영역을 벗어나 유예의 방식으로 전환된다. “슬픔의 폐사지”는 한때 찬란했던 관계가 허물어진 끝에 남은 황량한 유적이다. 온기 어린 말들이 빠져나간 자리, 적막만이 깃든 그곳에서 “네 침묵을 듣는다”는 선언은 서늘한 역설로 울린다. 이 청취는 가청 범위를 넘어선다. 공백의 밀도를 감각하며 말을 미룬 채 타자의 세계를 더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장 부호는 관계의 시공간을 시각화한다. “마침표를 찾아서 더듬는 그 문장은” 종결을 향하면서도 닿지 못하는 갈증으로 남는다. 빈자리는 “쉼표에서 쉼표로 끝없이 이어”지는 호흡이다. “가장 긴 만연체 생애”는 곡절의 문법을 삶의 시간으로 확장하지만, 그 서사는 마침내 “읽을 수 없다”라는 선언 앞에 멈춘다. 독해의 불가능성은 해석의 권한을 내려놓는 조용한 항복이다. 결국 사랑의 언어는 단어 사이의 여백과 머뭇거림의 문장에 가까워진다. 시인은 미결의 구조를 통해 사랑의 지속이 지연과 미독(未讀) 속에 있음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유심상을 수상했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39 _ 김일연의 「사랑의 언어」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39 _ 김일연의 「사랑의 언어」 - 미디어 시in
사랑의 언어 김일연 침묵의 끝 간 데 어딘지 알 수 없는 너의 언어는 늘 말없음표를 거느린다 슬픔의 폐사지에서 네 침묵을 듣는다 마침표를 찾아서 더듬는 그 문장은 쉼표에서 쉼표로 끝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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