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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흔과 ‘그늘’마저 큰 품으로 감싸는 따뜻한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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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6. 9. 19.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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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를 더푸른 출판사에서 발간

 

 

 

하린 기자

 

2003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임경자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를 더푸른 출판사에서 발간했다.

 

두 번째 시집 『어우렁그네』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도 결핍으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직관한 후 형상화하는데, 그것을 편편마다 따뜻한 서정으로 감싼 채 펼친다. 삶의 순간순간 찾아온 상흔에 함몰되거나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가 암시되어 임경자 시집을 읽으면 마음의 위로가 찾아 온다.

 

상흔은 삶의 ‘그늘’이다. 임경자 시인은 그 “그늘이 그저 부정적인 감정으로 주체를 절대적 슬픔에 전락케 하진 않는다. 시인이 ‘그늘’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회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병국 평론가 해설 중에서) ‘그늘’은 햇빛의 반대가 아니라 삶에서 동반될 수밖에 없는 불가분한 요소이다. 햇빛의 힘만 있는 게 아니라 ‘그늘’의 힘도 있기에 시인은 ‘그늘’이 가진 의미와 결을 포착하여 시화시킨다.

 

또한 임경자 시인은 시적 국면에 한발 물러나 있지 않고 매 순간 철저하게 대상과 함께 호흡하며 밀착한다. 그래서 흔한 소재도 특별한 소재로 만드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 소재나 모티브가 주로 생활 속 사물이나 현상이 많은데, 그 소재와 모티브를 자신만의 경험 맥락으로 확장해 나간다. 그래서 편안하게 읽히면서 은연중에 다가오는 특별한 매력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소소한 시 읽기 너머에 따뜻한 서정과 특별한 매력이 숨겨져 있는 시집이 『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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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앨런 튜링*

 

임경자

 

어두운 방에 그를 닮은 기계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나는 말을 걸어본다

“기계처럼 생각하고 있나요?”

 

대답 없는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다가

자꾸만 내 눈길이 아래로 떨구어진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인간만 생각하는 영혼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당신의 의견은 이해받았나요?”

그의 침묵은 계속되고 나는 호기심을 닫는다

 

세상의 말들이 통하지 않을 때

그는 낯선 문자를 풀어냈지만

자신의 과거는 풀지 못했다

 

나는 2026년으로 돌아와

손바닥만 한 기기에게 질문한다

“앨런 튜링도 AI 개발자인가요?”

“네, 현대 기준으로 보면 AI 개발자 시초 같은 분…”

 

그는 죽고 그를 닮은 기계가 그를 설명한다

지금 그는 있는 걸까? 없는 걸까?

 

6개월 시한부인 내가 1년 후에 읽힐

나의 시를 쓰고 있는데…

 

*1936년 영국의 수학자 튜링이 고안한 이론적인 계산기 및 현대컴퓨터 과학의 선구자이자 인공지능(AI) 개념을 처음 제시했으며, 기계가 지능을 갖췄는지 판별하는 '튜링 테스트'를 고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 더푸른 출판사,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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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임경자

 

상암동 하늘공원 갈대숲에 야고*가 빌붙어 산다

 

제주 억새가 서울 오는데 따라왔을까

 

어떤 기생은 그렇게 집요하다

 

내게도 고독이 빌붙어 산다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수십 년 따라다니며

 

자꾸 시를 쓰게 만든다

 

새떼 떠난 휑한 벌판에 서 있을 때

 

새가 남긴 깃털을 오래 바라보게 하고

 

노을 지는 지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볼 땐

 

어둠에 떨게 될 여린 꽃의 숨소리를 듣게 한다

 

고독한 것이 고독한 것을 감지하게 하는 것은 고독의 습성일까

 

고독과 함께 살아온 지 수십 년 독한 시가 나왔다

 

지독한 고독의 기생을 나는 당분간 방치할 거다

 

*들판에 사는 풀이라고 해서 ‘들 야(野)’자와 ‘줄풀 고(菰)’자를 합쳐 부른다. 억새 뿌리에 기생한다.

 

―『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 더푸른 출판사,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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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버스

 

임경자

 

S#1. am 8시/ 잠실역 너구리상 앞

너구리 상 앞에는 단풍놀이 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11월 주말이라 복잡한 길, 타고 갈 버스 기사가 계속 통화 중이다. 우리는 보험설계사 40으로 내장산에 가려고 이곳에 모였다. 나와 그림자가 등산복 차림으로 맨 뒤쪽 의자에 앉는다.

 

S#2. am 10시/ 정안알밤휴게소

내려오면서 내내 말이 없던 기사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0분 후에 출발합니다.” 첫마디를 던진다. 나와 그림자는 화장실에 들른 후 커피를 들고 차에 오르고 모두 승차했다는 듯 기사가 다시 고속도로를 달린다.

 

S#3. pm 12시/ 정읍전복돌솥밥집

내장사 가는 길에서 산을 올려다보니 아래쪽은 짙은 녹색, 중간은 노란색, 위쪽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빨강! 빨강! 소리치면서 나와 그림자가 위쪽을 향해 먼저 뛰어간다. 빨강! 빨강!이 감탄사가 아니라 호명 같다.

 

S#4. pm 3시/ 내장산 주차장

한 참이 지나도 한 사람이 차에 오르지 않는다. 두 번째 안내방송 멘트를 들은 그림자가 울면서 차에 오른다. 그림자가 주목받는다. 실적이 거의 없던 그림자, 마이크를 잡고 울먹울먹 미안함을 표시한다. 우리 모두 그림자의 이름을 처음으로 새겨 넣는다.

 

―『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 더푸른 출판사,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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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흔과 ‘그늘’마저 큰 품으로 감싸는 따뜻한 서정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2003년 계간 《시현실》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임경자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언제 초록을 궁리하는지 알 수 없어』를 더푸른 출판사에서 발간했다. 두 번째 시집 『어우렁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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